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경개(景蓋). 호는 석계(石溪). 아버지는 군자감직장인 송상장(宋尙長)이며, 어머니는 동복오씨(同福吳氏)로 찰방 오익후(吳益厚)의 딸이다.
1589년 향시(鄕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에 임명되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의 모함을 입어 삭과(削科)되었다. 그 뒤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뒤 회령첨사(會寧僉使)를 지내고 경상병사가 되었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일시 고향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각지로 격문을 보내 의병 수만 명을 모은 뒤 부사를 지낸 나적(羅迪)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이 되어 장성으로 진군하였다.
그 때 적군이 남원성을 포위하고 있어 군량이 부족하므로 여러 군에 격문을 보내 의곡(義穀) 800여 섬을 얻어 군량을 확보하고, 남원성으로 진격하여 적장 7인을 베고 전사하였다. 그 뒤 나라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저서로는 『석계결고(石溪缺稿)』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