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75년에 원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아올린 뒤 원형대로 옮겨 지었다.
비각은 4면 1칸인 팔작지붕 건물로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중방(中防) 밑에 판벽(板壁)을 둘렀으며, 추녀 네 곳에 모두 활주(活柱: 추녀 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를 받쳐 구조적 안전을 꾀하였다. 화반(花盤: 초새김한 받침)과 공포(栱包)에 새겨진 초각(草刻)이 아름답다.
1792년 3월에 정조는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을 내려서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이만수가 돌아와 진상한 시권을 정조는 몸소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규장각 각신들과 함께 채점하여 시상하였다. 도산별과는 전례가 드문 특별시험으로서, 여기서 삼상(三上)의 성적을 받은 2인은 급제(及第)로 인정하여 전시(殿試)에 직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삼중(三中)을 받은 2인과 삼하(三下)를 받은 7인에 대하여 또한 2푼과 1푼의 가산점을 받았다.
도산별과를 시행한 장소가 시사단이다. 1796년(정조 20)에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해 글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현재의 비는 1824년(순조 24) 비각을 다시 지을 때 새로 새겨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