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토기는 고대국가 신라 영역에서 생산하여 소비한 일체의 토기이다. 대체로 3세기 후반부터 신라 멸망 때까지 생산·소비된 토기를 말한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까지는 와질토기를 중심으로 연질·도질토기가 병존했고, 5세기 초부터 도질·연질토기만 생산되면서 전형적인 신라양식 토기가 성립되었다. 이후 낙동강 동안 지역으로 범위가 확대되며, 6세기 후반에는 크기가 작아지고 장식도 간략해졌다. 7세기 후반의 인화문 유행, 8세기 후반의 몸통이 긴 병·호 및 편호·편병·덧띠무늬병 유행을 거쳐 10세기에는 문양새김이 사라지고 고려 도기와 자기 형태로 계승되었다.
신라토기는 신라의 성립 시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신라영역에서 생산 · 소비된 토기를 지칭하지만, 실제 신라의 성립 시기를 정확하게 설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시기를 안다고 해도 토기에 신라의 성립 시기가 바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경주를 중심으로 울산 · 포항 등의 물질자료의 양상이 같게 되는 3세기 후반 이후부터 생산 · 소비된 토기를 신라토기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3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초까지 신라영역에서 생산 · 소비된 신라토기는 신라의 영역 확장에 수반하여 분포범위가 확대되었고, 시기에 따라 토기의 종류와 질 · 장식 · 기종과 기형 등의 변화가 있었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의 신라토기는 태토와 소성온도가 다른 와질토기 · 연질토기 · 도질토기 3자가 병존하였는데, 영남의 다른 지역, 특히 부산과 김해 등 금관가야 지역의 토기에 비해 와질토기의 수량과 종류가 다양하여 와질토기의 전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5세기 초가 되면 와질토기는 사라지고 도질토기와 연질토기의 양자만 생산되면서 전형적인 신라양식토기가 성립되고, 5세기 전반 이후 지속적으로 낙동강 동안 지역으로 확산된다. 6세기 후반에는 토기의 크기가 작아지고 장식도 간단해지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후반에는 도장으로 찍은 인화문(印花文)이 유행한다. 8세기 후반에는 몸통 길이가 긴 병 · 호와 몸통의 양쪽 면 또는 네 면을 편평하게 만든 편호 · 편병과 덧띠무늬병이 유행한다. 이때부터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기종과 문양이 새겨진 기종이 공존하면서 9세기 후반까지 유지되다가 10세기에 들어오면 문양 새김은 사라지고 고려 도기와 자기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신라토기의 변화와 흐름을 단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시기구분이 진행되어 왔다. 신라토기를 전기양식 토기와 후기양식 토기의 양대 양식으로 구분하거나 전기 · 중기 · 후기 · 통일양식 등 4양식으로 구분하거나 『삼국유사』의 신라사 시기구분안을 신라토기에 대입하여 중고(中古)양식 토기로 구분한 안이 제시되기도 하였고, 전기 · 중기․후기 · 말기양식의 4시기로 나누어서 구분한 안 등이 제시되었다.
신라토기를 전기와 후기의 2시기로 구분한 안은 경주지역의 고분문화가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축조기의 신라전기 고분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축조기의 신라후기 고분이 적절하게 대응된다고 파악하였으나 적석목곽묘 조영 이전의 신라토기를 포함할 수 없고, 통일신라토기는 통일 이전의 신라토기를 계승하였지만,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이전 시기의 토기와 동일한 양식으로 묶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신라토기를 전기(4세기 후반∼6세기 전반) · 중기(6세기 중엽∼7세기 3/4), 후기(7세기 4/4∼8세기말) · 말기양식(9세기 초∼10세기 전반)으로 구분한 안은 신라토기의 시작을 영남지역의 공통양식 토기에서 신라토기가 분립하는 점을 중시하였고, 그 시작 기점을 적석목곽묘의 시작과 일치시킨 것이다. 신라토기의 시작을 4세기 후반으로 설정할 경우, 4세기 후반 이전의 토기는 신라토기가 아닌 것이 되므로 신라를 부정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토기의 성격 및 기종조성 · 문양 · 제작기법 등 많은 부분에서 통일 이전의 신라토기와 다른 토기가 생산 · 소비되었기 때문에 단순한 변화를 나타내는 시기 구분 안으로서는 전체 신라토기의 변천 및 변화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리고 후기와 말기의 토기에는 양식적으로 구분할만한 현저한 변화가 간취되지 않기 때문에 별도의 양식으로 설정하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신라사 시기구분에 신라토기의 변화를 적용하여 양식명을 붙인다면, 『삼국유사』에서 구분한 혁거세거서간(서기전 57년)부터 지증왕까지 600여년의 토기를 신라 상고양식 토기, 태종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의 신라토기를 하고양식 토기로 묶는다면, 신라토기의 변천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 특히 서기 전후부터 6세기 전반까지의 토기를 하나의 양식으로 설정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따라서 특정 시기만을 대상으로 하여 토기양식을 설정하기보다 신라토기의 변화 패턴과 의미를 계기적으로 유추할 수 있고, 정치적 변동 및 사회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시기구분 및 용어 사용이 필요하다.
신라토기란 사로국의 성립부터 신라가 멸망하기까지의 토기를 지칭하지만, 적어도 신라, 구체적으로는 경주와 그 주변지역에서 소비된 토기의 종류와 형태 등에서 공통적인 특징이 나타나는 3세기 후반 이후부터 신라토기로 설정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적절하다. 그리고 신라토기의 제요소-질 · 제작기법 · 기종조성 · 장식기법 · 주 사용처 등을 포괄할 수 있는 시기구분이 필요한데, 전기 · 중기 · 후기 · 통일양식 토기의 4시기로 구분해서 신라토기의 흐름과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말까지의 토기가 해당되며, 와질토기가 중심을 이루는 시기와 도질토기가 중심을 이루는 시기로 다시 세분된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까지는 와질토기가 대부분이며, 연질토기와 도질토기의 양은 매우 적다. 아가리가 수평으로 뻗은 고배, 뚜껑이 있는 호, 아가리가 밖으로 길게 뻗고 손잡이가 달리지 않는 화로모양토기〔爐形土器〕등이 있고, 특수한 토기로서는 오리모양토기〔鴨形土器〕가 있다. 4세기 전반이 되면, 화로모양토기는 아가리가 밖으로 심하게 벌어지는 형태로 바뀌며, 손잡이가 달리지 않은 컵형토기와 종타원형의 원저단경호(圓低短頸壺)가 새로운 기종으로 부장된다. 일상토기로는 옹 · 호 · 완 · 시루 · 화로모양토기 등이 있고, 대부분 와질이다.
4세기 후반이 되면, 와질토기가 사라지고 도질토기로 바뀌며, 무늬 없는 호, 통형의 고배, 컵형토기 등이 있다.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도질토기, 특히 고배는 함안을 포함한 서부 경남지역의 토기와 비슷하여, 이 지역의 토기에 묶어서 함안양식 토기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경주에서 출토된 통형의 고배가 함안양식에 포함된다면, 함안 또는 함안의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이 경주로 이입되었거나 함안지역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영향(도제술과 표현요소 등) 아래에서 생산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경주, 즉 사로국(斯盧國)의 토기가 함안의 안야국(安邪國, 安羅國) 토기의 영향 하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 시기의 고배는 김해-부산지역에서 출토되는 고배를 제외한 전 영남지역의 고배 형태가 비슷한 양상이지만, 광역의 지역 단위별로 색상과 부분적인 요소에서 다른 특징도 있다. 그리고 4세기의 토기가마 조사에서 각 지역마다 유사한 토기가 생산되었음이 확인되어 함안양식 토기로 일괄할 수 없다. 그리고 경주지역에서 출토한 대부직구호 · 시루 · 옹 · 오리모양토기 · 화로모양토기 · 컵형토기 등 대부분의 신라토기가 존재하고, 이와 유사한 특징을 지닌 토기가 함안지역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신라의 특징적인 색채를 띠는 소위 신라양식 토기가 성립되면서, 부산 · 대구 · 성주 · 상주 · 김천 · 안동 등의 낙동강 동쪽의 영남 각지와 강원도의 동해안지역으로 확산한다. 신라양식 토기의 성립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첫째는 신라양식 토기의 성립을 4세기 중엽, 즉 마립간기(麻立干期)의 시작과 일치시키고, 신라토기 양식의 분포권을 곧 신라의 영역으로 보는 견해이다. 둘째는 신라양식 토기라는 관용어 대신 낙동강 이동양식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면서 이동양식의 성립은 뚜렷한 중심지 없이 여러 지역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안양식과 서안양식으로의 분리는 5세기 초에 이루어지며 각 토기생산의 중심지에서 그 나름대로 앞 시기의 아기종이나 기형이 서서히 소멸하고 낙동강 동안지역의 공통적인 양식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5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고배 · 장경호 · 연질유 개발 등의 신라토기가 대구-경산-경주-울산을 잇는 선을 따라 확산되고 6세기 초에는 부산 · 양산 · 안동 · 칠곡 · 창녕 등지로도 확산된다. 이러한 경주지역 동안양식 토기의 확산은 신라의 영역확장, 군사적 정복, 지방지배 등과 관련된다고 한다.
4세기 말∼5세기 초로 편년되는 경주 · 울산 등지의 분묘에서 출토되는 고배는 전체 높이가 20㎝에 이르고, 대각이 나팔모양으로 길게 뻗고 배신이 밖으로 벌어지고 깊이가 얕은 특징을 보이는데, 이와 유사한 고배는 부산 · 김해지역에서도 출토된다. 넓은 지역에서 분포하는 고배에서 공통적인 특징도 있지만, 경주 · 울산지역만의 특징도 동시에 보인다. 그리고 몸통이 횡타원형이고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지는 원저장경호와 일단장방형투창(一段長方形透窓)이 있는 대부완(臺附碗), 파수부완(把手附琬) · 대부파수부완(臺附把手附琬) 등의 기종은 경주지역에서 먼저 등장한다. 뒤이어 일단투창유개고배(一段透窓有蓋高杯)와 상하엇갈림투창고배 등 전형적인 신라양식 토기의 전형이 갖추어지면서 인접한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경주지역의 토기와 유사한 기종 및 특징을 지닌 토기가 분포한다. 최근의 조사성과와 양상을 고려하면, 신라양식 토기는 경주에서 성립되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양식 토기의 성립이 곧 신라가 영역국가를 건설하였다는 결정적 근거인가는 앞으로 검토가 필요하다.
5세기 초가 되면, 와질토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고배 · 단경호 · 장경호 · 통형기대(筒形器臺) · 발형기대(鉢形器臺) · 컵형토기 · 대부완 등과 서수형토기(瑞獸形土器) · 기마인물형토기 · 오리모양토기 · 배모양토기 · 수레모양토기 등 다양한 종류의 도질토기가 등장한다. 5세기 전반의 신라토기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기종인 고배는 일단 또는 이단일렬, 상하엇갈림 등 다양한 투창이 배치되고, 뚜껑이 없는 형식과 덮인 형식이 모두 확인된다. 신라양식 토기 성립 당초에는 상하일렬투창고배(上下一列透窓高杯)와 유개고배가 많았으나 시기가 지나면서 전체적인 높이가 줄어든 무개식(無蓋式)의 상하엇갈림투창고배로 통일이 이루어진다. 호는 단경호와 장경호,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로 분화하고, 장경호는 목 중앙에 돌대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일부는 상 · 하 또는 하단에 파상문(波狀文)을 시문하였다.
5세기 후반이 되면, 고배는 뚜껑이 덮이는 유개고배로 바뀌고, 대각의 폭이 줄어들고 비스듬하게 뻗는다. 장경호는 아가리가 안쪽으로 오므라들고, 길이가 길어진다. 고배는 무투창고배 · 일단투창고배 · 상하엇갈림투창고배 등으로 기형이 분화되고, 호도 단경호 · 원저장경호 · 대부장경호 등으로 기형분화가 나타난다. 5세기 후반의 신라토기 변화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토기에서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토기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고배와 대부완에 뚜껑이 덮이고, 뚜껑 · 고배 · 장경호 · 발형기대 표면에 손으로 선을 그어 만든 삼각집선문과 콤파스반원점문으로 표면을 장식하였는데, 이는 이후 신라토기의 모델이 되었다. 황남대총 남분의 부장 토기에서 나타나는 신라토기의 제도술과 디자인은 낙동강 동안지역의 지역적 특색이 강한 토기의 전통을 와해시키고 신라 중심의 토기와 동일한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장경호와 뚜껑에 활을 쏘거나 악기를 치거나 성교하는 모습, 개구리 · 뱀 · 자라 · 원숭이 · 거북이 · 물고기 · 가재 · 소 · 부엉이 등의 다양한 모양과 자세를 보이는 토우(土偶)를 부착하였다. 특히 대부장경호는 견부와 목 표면에 말 그림을 그리거나 여러 종류의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6세기에 들어오면 부가구연장경호 · 뚜껑접시 · 병모양토기 등 새로운 종류가 등장하며, 고배에 뚜껑이 덮인다. 또 파상문과 즐묘열점문이 쇠퇴하고 삼각집선문과 점원문 · 반원점문이 새로운 문양으로 등장하여 유행한다. 신라가 진출해간 한강유역과 서부 경남지역, 함경남도 남부지역까지 신라토기가 넓게 보급된다. 후기양식 토기의 특징은 고배 · 장경호 · 부가구연장경호(附加口緣長頸壺) · 컵형토기 · 유개합(有蓋盒) · 유개옹(有蓋甕) 등 종류가 많지 않고, 삼각집선문과 반원점문 등 단순한 문양을 시문한 점이다.
중기양식 토기에서 후기양식 토기로 변화한 요인에 대해서는 외래 토기(백제토기 또는 대가야계 토기)의 영향 또는 자체발전이라는 견해가 있다. 외래 토기의 영향이란 백제 또는 가야 고배의 대각 길이가 짧은 것에 영향을 받아 신라 고배가 짧아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라 고배는 6세기 전반부터 길이가 줄어드는 자체적이고 점진적인 변화과정을 밟아왔고, 고배 이외의 기종은 경주에서 먼저 만들어져 지방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에 후기양식 토기의 성립은 5세기 말 이후 신라토기 자체 내의 점진적인 변화의 소산물이다.
후기양식 토기의 또 다른 특징은 토기 표면 또는 내면에 예서로 새기거나 먹으로 쓴 명문토기(銘文土器)의 존재이다. 예서로 새긴 명문은 정(井) · 정물(井勿) · 생(生) · 대간(大干) · 상(上) · 말(末) · 처랑(處郞) 등이 있다. 묵서 명문은 ‘상찬간도(上撰干徒)’가 있다. 토기에 새겨진 명문은 관등명 · 인명과 의미와 내용을 잘 알 수 없는 주술적 단어 또는 기호 등이다. 토기에 새겨진 명문은 토기소성 전에 새겼기 때문에 토기제작자에 의해서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주문자 또는 사용처와 특별한 용도에 맞도록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문자가 표현된 토기가 당시 수도인 경주뿐만 아니라 지방의 대형묘는 물론 산간 오지의 소형묘에 이르기까지 출토된다는 사실은 이 시기에 이르러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660년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삼국의 문화가 하나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고, 신라토기는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전 지역으로 보급되었다. 통일신라의 토기는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토기를 기반으로 하고 여기에 고구려 · 백제토기의 요소가 더해졌다. 게다가 중국 당의 도자기와 금속용기의 형태 및 문양의 종류와 시문수법을 수용하여 성립 · 변화하였고, 통일 이전과는 다른 토기문화가 전개되었다. 통일신라토기는 일상토기, 분묘 부장토기, 화장한 후 뼈를 담는 장골기(藏骨器) 등으로 구분되고, 왕경과 지방에서 사용한 토기의 종류와 문양 장식에서 차이가 있다. 왕경의 일상토기는 종류가 다양하고, 표면에 화려한 문양을 시문한 것과 문양이 없는 것의 두 종류로 나뉜다. 표면에 장식이 된 종류로는 유개합 · 횡병 · 개 · 호 · 주름문병 등이다. 지방의 일상토기로는 유개합 · 횡병 · 호 · 종병 · 옹 등 종류가 단순하며, 횡병은 문양이 시문되었고, 이외의 종류에는 대부분 문양이 없다.
불교의 장법에 따라 주검을 태운 후 남은 유골을 용기에 담아 지하에 매장하는 행위가 통일신라시대에 왕경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는데, 유골을 담는 용기로서 토기가 애용되었다. 장골기로 사용된 종류로는 호 · 옹 · 합 · 호 등이 있는데, 왕경 주위의 산록에서 출토된 장골기는 내용기와 외용기의 이중으로 된 사례가 많고, 뚜껑과 몸통 전면에 여러 가지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또 연유도기(鉛釉陶器)를 이용한 사례도 있다. 지방의 화장묘 장골기는 유개합 · 옹 · 완 등이 있고, 일상토기를 장골기로 전용한 사례가 많다.
통일신라토기에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매우 다양한 문양이 시문되어 신석기시대 토기와 더불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통일신라토기에 새겨진 문양의 종류는 50여 가지 이상 되는데, 물체를 본떠서 만든 종류도 있지만, 대부분은 도상적인 문양이다. 도상적인 문양은 불교조각품에서 표현되는 문양을 차용하였거나 또는 그것을 변형시켜 만들었다. 같은 문양 여러 개를 새긴 시문구로 시문한 문양(연속마제형문 · 점열문 · 연주문), 하나의 문양만 새긴 시문구로 시문한 문양(국화문 · 수적형문 · 화문 · 능형문 · 비조문 · 엽문 · 운문), 각기 다른 문양을 횡 또는 종으로 조합한 문양 등이 있고, 물레의 회전력을 이용하여 새긴 파상문도 유행하였다.
통일신라토기는 문양 종류와 새기는 기법 및 배치 방식 등에 근거해 몇 단계로 구분하였고, 종래에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말까지의 인화문기와 9세기 초부터 10세기 초까지의 비인화문기로 양분해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진 발굴조사 성과와 연구에 의하면, 9세기에도 인화문이 유행하는 사실이 확인되어 인화문기와 비인화문기로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토기의 종류와 문양의 특징 등을 근거로 하여 통일양식 토기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 직후인 7세기 후반의 통일신라토기는 신라후기양식 토기의 요소를 계승하면서 삼국통일을 계기로 고구려 · 백제 · 당의 문화를 수용하여 그 이전과는 다른 토기문화가 성립한다. 일상토기가 대세를 점하면서 일상용기의 기종이 증가함과 동시에 식기인 유개합 · 완 · 병 등이 주요 기종이 되고, 분묘 부장용인 고배와 부가구연장경호 · 파수부옹 등이 현저하게 쇠퇴한다. 그리고 개와 병 등의 일부 기종의 표면에 연속마제형문 · 수적형문 · 국화문 등의 인화문이 장식되고, 삼각집선문은 사라진다.
8세기 전반이 되면, 뚜껑은 모두 내구연이 있고, 개신 외면 전면에 문양이 시문되었다. 연속마제형문의 치구 수는 5∼7개 내외이며, 2단에 걸쳐 시문한 예가 대부분이다. 8세기 후반이 되면, 유개합이 주종을 이루고, 여기에 길고 좁은 목이 있는 세경장경의 장동병(長胴甁)과 장동호(長胴壺) · 주름문병 등의 새로운 기종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횡구형의 호와 병의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8세기 후반부터는 종구형의 일상토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기종조성과 양식 면에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수적형문이 사라지고, 연속마제형문은 쇠퇴하며, 대신 점열문과 운기문 · 연주문 · 화문 · 능형문 등이 시문된다.
9세기에는 장경병 · 장동호 · 사면편병(四面扁甁) · 사면편호(四面扁壺) · 주름문병 등이 유행하고, 왕경 귀족의 전용 장골기로 연결고리유개호가 새 기종으로서 나타난다. 횡병은 그 수가 감소한다. 연속마제형문은 사라지고, 점열문이 주문양을 차지한다. 점열문은 일렬 또는 지그재그식으로 배치하였는데, 주로 합의 뚜껑과 합, 연결고리유개호의 장식에 애용되었다. 뚜껑과 호의 몸체에는 4∼6종류의 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는데, 문양의 좌우를 호선문(弧線文) 또는 연주문(連珠文)으로 연결하여 장식한 것이 유행한다. 이 시기의 토기가 통일신라토기의 문양 종류 중에서 가장 다양하고 화려하다. 액체물을 저장하는 용기는 대부분 무문양이고, 식기와 장골기 등은 화려하게 장식하여 인화문이 시문된 종류와 무문인 종류로 구분되는 양상이 뚜렷하다.
통일신라토기는 삼국시대에 유행한 기종과 계통이 연결되지 않는 기종이 다수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사이부호(四耳附壺), 굽이 없는 유개합, 세경의 장동병, 수각삼족호(獸脚三足壺), 주름문병, 주자(注子), 굽이 없는 유개합, 수각다족연(獸脚多足硯) 등이다. 이 기종의 대부분은 신라 왕경유적에서 출토되어 왕경의 지배층들이 사용한 일상용기였다. 상기 기종들과 유사한 형태가 중국 당의 도자기 또는 금 · 은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통일신라토기의 가장 큰 특징인 인화문의 종류는 매우 많은데, 그 중에 비조문(飛鳥文) · 운기문(雲氣文) · 다변화문 · 사변화문(四弁花文) 등과 호선과 호선이 접하는 곳에 능형문(菱形文) 또는 합성문을 배치하여 문양을 구성하는 방식 등은 중국 당의 금 · 은기에도 보여 중국 당나라 용기와 밀접한 관련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