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제(汝濟), 호는 영모당(永慕堂).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신태(辛泰)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학식과 서예가 뛰어났다.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음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안의(成安義)·곽찬(郭趲)·조열(曺悅) 등과 함께 창의하고는 영산(靈山)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성천희(成天禧) 등과 함께 그해 8월 창녕전투에 참가하여 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형 신방주(辛邦柱)와 동생 신방로(辛邦櫓)도 의병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