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전투는 4월 부산포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만여 왜군이 경주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 때마침 경주부윤의 교체가 있었는데, 전임 부윤 윤인함(尹仁涵)은 후임으로 오는 변응성(邊應星)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하였다. 이에 판관 박의장(朴毅長), 장기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이 군민 수 천 명을 모아 성을 지키려 했으나, 박의장도 버티지 못하고 도주하였다. 이튿날 왜군은 영천을 점령하고 충주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경주 관군은 왜적과 싸움조차 못해 보고 영토를 점령당했다.
2차 전투는 그 해 8월에 감행되었다. 즉, 7월에 의병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은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병력을 권응수의 휘하에 합세시켰다. 그리고 거의 1만의 병력으로 다음 달 경주 탈환을 목적으로 권응수 · 박의장을 선봉으로 삼아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때 언양 방면에 있던 적의 기습을 받아 박진의 군사는 패주하였다.
3차 전투는 2차 전투에서 패한 박진이 재차 경주 탈환을 결의하고 결사대 1000여 명을 모집, 성 밑에 잠복시킨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 등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판관 박의장을 선봉으로 그 해 9월 다시 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비격진천뢰의 공격을 받아 수 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약 1만석 가량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西生浦)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 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4차 전투는 1593년(선조 26) 8월에 있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남도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철수시켰던 때이므로, 경주성 방면에는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왕필적(王必迪)의 군사가 수비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경상좌병사 고언백(高彦伯), 영천조방장(永川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이 후원하고, 명군도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등이 와서 도왔다.
한편,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의 군사는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주 경주성 방면을 공격하기가 마침내 8월 6일 불시에 수천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로써 쌍방 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명군과 합세해 끝내 적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는 국난의 와중에서 분연히 일어난 민중의 힘으로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비격진천뢰라는 새로운 무기의 위력을 보여준 전투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