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에 참전한 무신이다. 1554년(명종 9)에 태어나 1592년(선조 25)에 사망했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에 입사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판관이던 김시민은 인근 지역의 군사와 의병과 연합하여 여러 차례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 공으로 진주목사로 승진하고 다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왜적이 2만여 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요충지 진주성을 포위하고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자 3800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물리쳤다(진주대첩). 이 전투에서 이마에 맞은 탄환으로 인해 사망했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에 입사하였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 · 진해 · 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 ·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 · 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 방식을 모방해 염초(焰硝) 500여 근과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했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안에 명령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시켜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 적과의 싸움에 대처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 ·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