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4월 15일 동래성에 침입하였다. 이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동래성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결의하고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적군은 3대(隊)로 나누어 1대는 성의 동쪽으로 우회하고, 1대는 성 서쪽으로 나아가며, 주력부대는 남문 앞에 집결하였다.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나무판을 세우고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크게 써서 성 밖에 세워놓고 항복을 권유하였다. 이에 송상현은 목판에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써서 그들에게 보임으로써 결사항전의 투지를 밝혔다.
이처럼 회유가 거부당하자 전면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이 3중으로 성을 포위한 뒤 1대가 뒷산으로 성을 우회하여 경사진 산 중턱의 성벽을 넘어 함성을 지르며 난입하자, 성안은 혼란에 빠지면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우리 측 군사는 물론, 무기를 채 가지지 못한 동래성의 백성들까지도 모두 싸움에 참가하였다.
중군(中軍)을 비롯한 막료군관, 양산군수 조영규는 송상현과 함께 독전(督戰)하면서 끝까지 싸웠지만,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의 무차별 살육에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전사하였다. 마침내 동래성이 함락되었으며, 부사 송상현도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