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고종 17)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은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駐日淸國公使館參贊官)이었던 황준헌(黃遵憲)이 당시 조선의 당면과제와 외교정책을 적어 놓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받쳤다.
부국자강(富國自强)을 위한 개화정책을 추진 중에 있던 정부는 개화부국자강책을 인식시키기 위해 『조선책략』의 복사본을 전국 유생에게 배포하였다. 또한 정부기관의 개편과 일·청 양국에의 유학생 및 시찰단의 파견 등 개화정책을 강행하였다.
이에 수구파 정객과 전국의 유생들의 수교개화(修交開化)를 반대하는 상소가 잇달아 제출되었다. 특히 전국 유생들의 척왜상소가 중심을 이루어 이른바 신사척사운동이 전개되었다. 신섭의 상소문은 1881년 윤7월에 올려진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 충청도 유생 조계하(趙啓夏), 전라도 유생 고정주(高定柱)와 더불어 경기도 유생을 대표한 4도 유생상소의 하나이다.
이들 상소문은 다같이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한 왜양(倭洋)과의 수교개화를 반대하고 『조선책략』의 사학성(邪學性)을 지적, 비판하고 도일한 김홍집과 개화정책에 동조한 중신들을 배척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신섭은 신사척왜상소문의 공통된 『조선책략』의 사학성의 지적과 사교(서학)의 배척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조선책략』을 일본에서 가져와 전국에 전파시킨 장본인인 김홍집에 대한 치죄를 강력히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개화를 주장하고 있던 중국의 이홍장(李鴻章)과 접촉, 밀함(密函)을 주고받은 이유원(李裕元)까지도 비판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