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심산의 22세시인 고종 38년(1901)에 일어난 화재로 불에 탄 것을 중수개축한 것이다.
1901년 화재 이전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대로부터 세거하여 왔고 고종16년(1878) 7월10일에 심산이 태어났다. 생가는 안채만 현존하는데 정면4칸 측면1칸의 -자형집이다. 안채는 청천서당(晴川書堂) 북쪽 100m정도 상거한 위치에 있다.
김창숙은 아버지 호림(護林)과 어머니 인동장씨 사이의 장남으로 자는 문좌(文佐) 호는 동강(東岡)공의 13대 위손이다. 심산은 1910년에 성명(星明)학교를 세워 후진양성 하였고 일진회를 성토하다 옥고를 치루었고 일제가 강점하자 중국에 망명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는 한편, 유림단(儒林團)을 통해 구국항쟁 하여 마침내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다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되었고 전국 유림을 정비하여 성균관대학을 일으켜 국학의 정통성을 되살린 민족문화 창달의 주축이 되었다.
그의 생가는 홑처마 우진각기와지붕의 구조이며 향좌측부터 부엌, 안방, 마루, 건너방 순서로 평면이 구성되었는데 건너방 뒤로는 반침이 있고 대청 앞쪽엔 유리창문을 달았다. 건물 내에 13대조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저서인 『속자치통감목(續資治通鑑目)』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