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2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 · 대교(待敎) · 봉교(奉敎)를 역임하였다. 감찰(監察)과 공조 · 예조 · 이조의 좌랑을 거쳐, 152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531년 검상 ·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거쳐 1533년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에 뽑혀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으며, 1533년 의주부사에 올랐다. 1538년에는 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참판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참의 ·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541년에 대사성, 이듬해 특진관(特進官) · 형조참판, 1543년 한성부판윤, 다음 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호조판서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이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청천군(靑川君)에 봉해진 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7년 좌참찬 · 예조판서 · 우찬성 · 판의금부사 · 좌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른 뒤 좌의정을 거쳐 155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일처리에 세밀하였다.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리에 밝아서 혹 남의 질문을 받으면 직접 자신이 목격한 것처럼 막힘없이 응대하였다. 일찍이 탐라목사로 있을 때 그곳 산천을 살펴 지도를 그려두었다. 1555년 남해변에 많은 왜구가 침입했을 때, 가장 요충 지역이던 탐라가 당시 심연원이 그려둔 지도에 의거하여 대응책을 세워 이를 막아냈고, 이에 사람들이 심연원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한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혜(忠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