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에 영의정 홍순목의 천거로 6품직에 올랐으며, 곧 어윤중이 중심이 되어 운영된 감생청(減省廳) 설치와 함께 창설 실무진의 한 사람인 사과(司果)직으로 활동했다. 1897년에 참령(參領)이 되었고, 1890년에 정3품 중추원의관 칙임관 4등, 이듬해 되었다.
선조 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인 김용(金涌)에게 사시(賜諡)한 것과 같이 선무원종공신인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증 병조참의(贈兵曹參議)할 것을 품의하였다. 1902년에는 김일손(金馹孫)과 조헌(趙憲)에 관련된 인척과 문인을 예우하도록 건의하기도 하였다.
1904년에 시흥민란(始興民亂)과 직산광부란(稷山鑛夫亂)에 안핵사로 임명되어 사건처리에 힘썼다. 그리고 종2품으로서 전라남도 순찰사로 파견되었으며, 당시대에 있어서 국사 전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특히 국가재정사무를 탁지부에 통합하여 일원화할 것을 고종에게 상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