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남(安昌男)은 1901년 1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나 사립 화동학교(華東學校)를 거쳐 1911년 4월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에 입학, 1915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15년 4월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에 4월 중퇴하고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니시구〔西區〕의 자동차학교 전수과(專修科)에 들어가 자동차 운전기술을 배웠다. 이후 일본 도쿄 아카바네〔赤羽〕 비행기 제작소 기체부(機體部)에 들어가 비행기 구조와 조직 및 성능에 대해 6개월간 연구한 후 1920년 8월 도쿄 오쿠리비행학교〔小栗飛行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졸업하였다. 4월에는 오쿠리비행학교에서 교관으로 취직하였다.
1921년 8월 27일 제국비행협회 개최 도쿄-모리오카(盛岡) 간 우편비행대회에 참가하여 3등 조종 면허장과 상금 1,000원을 수여받았다. 1922년 5월 11일 일본 육군 항공국의 2등 비행사 검정 야외 비행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같은 해 6월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았다. 또한, 같은 해 11월 초 도쿄-오사카 간 1,400리(약 550km) 우편 비행을 마쳤고, 같은 달 도쿄 주오구〔中央區〕 쓰키지〔築地〕 수교사(水交社)에서 도쿄-오사카 간 우편 비행 왕복 성공에 대한 수상식에서 협회유공상 3,000원과 항공국의 상금 1,000원을 추가로 받았다.
이후 고국 방문 비행 계획을 구체화하여 실행에 옮겼고, 1922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 초청 ‘고국방문대비행’에서 서울 여의도에 전국에서 모여든 5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행기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서울 장안을 한 번 돌고 여의도 상공에서 고등비행의 묘기를 선사하였다. 이날을 포함하여 12월 13일까지 고국 방문 비행은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금강호는 단발쌍엽(單發雙葉)의 1인승으로, 일본 오쿠리비행학교 소속의 영국제 비행기였다. 고국에서는 안창남에게 전용기를 마련해 주고자 박영효(朴泳孝) · 권동진(權東鎭) 등 47명의 유지가 후원회를 조직하고 모금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고국 방문 비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 1923년 3월 말 비행기 추락사나 암살당하였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조선총독부가 이를 해명하는 소동이 있었다. 같은 해 6월 2~3일 일본 민간 비행기 경쟁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여 비행기 1대와 현금 2,000원을 수상하였고, 7월 4일에는 일본 항공국에서 특별한 시험 없이 1등 비행사 면허를 수여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도 1등 비행사 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모두 7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비행술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1923년 9월 일본 간토대지진〔關東大地〕 때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오보로 판명되었다. 지진으로 인해 교수로 있던 오구리비행학교가 전소되자 도쿄에 비행학교를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교사 건축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실패하였다.
1924년 3월 당시 일본 언론에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과 왕래하여 비밀리에 중국군에 가담한다는 보도가 전해졌고 협박장을 받기도 하였다. 1924년 하반기에는 일본 지바현〔千葉県〕 쓰다누마정〔津田沼町〕 이토비행기연구소에서 경사 비행을 연구하였는데, 같은 해 9월 27일 연구소 근처에서 돌연 적화방지단원(赤化防止團圓) 요시다 도루〔吉田貫〕 등 3명의 남자에게 중국 직예군(直隸軍)에 가담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습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된 10월 18일 귀국하게 된다.
1924년 12월경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 및 미국 등지에서 비행대 설립을 구상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과 접촉하였다. 이후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여 중국 혁명운동을 통한 한국의 독립운동을 구상 중이던 여운형(呂運亨)의 소개를 받아 중국 군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모색하게 된다. 1925년 남방 국민혁명군 측 궈쑹링〔郭松齡〕 군벌의 초빙을 받아 육군 중장 비행사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중국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며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10월 초 다시 여운형의 추천으로 펑위샹〔馮玉祥〕의 국민혁명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베이징과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張家口〕 사이를 왕복하며 활약하였고, 일본에 유학하던 조선인 비행사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군 및 항일 무장 투쟁에 함께 참여하였다. 다시 1926년 1월 산시성〔山西省〕이 관할하는 산시성항공대의 비행학교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1928년 10월경 난징〔南京〕의 국민혁명군과 연합하여 북벌 및 항일 무장 투쟁 중이던 옌시산〔閻錫山〕의 군대에서 항공군 제2대 사령관으로 소부대를 지휘하였으며, 허베이성 스자좡〔石家庄〕, 바오딩〔保定〕에서의 큰 공적을 남기며 소장(小將)의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중국군에 대한 조선인 비행사들의 참여를 통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항일 전쟁에 참전하는 항공 독립운동 방략을 추구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1928년 7~11월경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太原〕에서 신덕영(申德永) · 최양옥(崔養玉)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을 조직하여 비행학교 및 무관학교 설립과 군사 양성을 계획하였고, 대한독립공명단을 통해 상당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옌시산의 부하로 산시성군 항공 중장, 타이위안 비행학교의 교장으로서 다수의 청년을 지도하였다. 1930년 4월 2일 60여 명의 중국인 연습생을 교수하던 중 기체 고장으로 추락하여 순국하였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