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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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주창한 전제 개혁론이자 국가 체제 개혁론.
내용 요약

여전론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주창한 전제 개혁론이자 국가 체제 개혁론이다. 정전제를 통한 토지 분배 이론과 여(촌락) 단위 집단 농장을 통한 농업 협동 이론을 종합한, 토지 개혁과 함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경영 방식이다. 정약용은 ‘농자득전(農者得田)’ 원칙을 비롯해서 『반계수록』에 서술된 내용을 상당 부분 수용하지만 동시에 차이점도 보여 준다. 유형원이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토지를 지급하는 방법을 통해 문제를 풀어 간 반면에 정약용은 노동 능력을 중심으로 한 전문화와 분업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대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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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주창한 전제 개혁론이자 국가 체제 개혁론.
내용

여전론은 정약용이 38세 때인 1799년 곡산부사 시절에 구상한 전론(田論)의 핵심 개혁안이다. 정전제를 통한 토지 분배 이론과 여(촌락) 단위의 집단 농장을 통한 농업 협동 이론을 종합하여 토지 개혁과 함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협동 농장형의 농장 경영 방식이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전론(田論)에 담겨 있다.

정약용은 고대 중국의 정전법(井田法)이나 선배 실학자들이 주장한 한전제(限田制) · 균전제(均田制) 등 토지 개혁론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 대안으로 여전론을 제시했다.

여(閭)는 자연적인 지형, 즉 산곡(山谷)과 천원(川源) 등 지세로 경계를 삼았다. 그 경계선 안에 포괄된 지역에서 25가(家)를 일여(一閭)로 한다. 여 세 개를 합쳐서 이(里)라 하고, 이 다섯 개를 합쳐서 방(坊), 방 다섯을 합쳐서 읍(邑)이라 한다. 정약용은 군현(郡縣)의 치소(治所)를 읍으로 상정했다.

여는 여장(閭長)이라는 가부장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의 엄한 지휘를 받는다. 한 여의 토지는 당해 여의 여민(閭民)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자치적인 공동 농장으로, 땅 주인이 아닌 여장의 명령에만 따른다. 여장은 평소 농사 과정에서 개개인의 노동량을 기록한다. 가을이 되면 오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閭中의 都堂)으로 가져와 일한 날수에 비례해 곡물을 분배한다. 이때 국가에 바치는 세(稅)와 여장의 봉급을 먼저 제하고, 그 나머지를 노동량을 기록해 둔 일역부(日役簿)에 의거하여 여민에게 분배한다.

여전제는 군사 조직 체제로도 상정되었다. 여에는 여장을 두어 초관(哨官)으로 삼고, 이에는 이장(里長)을 두어 파총(把摠)으로 삼으며, 방에 방장(坊長)을 두어 천총(千摠)으로 삼고, 읍에는 현령을 두어 통제하는 방식이다. 여장의 권력은 절대적이어서, 군대의 필수적 요건인 엄격한 기율과 통솔 체제를 이미 가지고 있다. 그에 더하여 필요한 군사 기술과 지식은 훈련을 통해서 보완한다면 이상적인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전을 보장한다면, 국가 전체적으로 10년 내에 인구의 분포 상태가 평균화될 것이라고 정약용은 주장했다. 나아가, 이것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면 모든 농민들은 여라는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수확의 배당은 농민 개개인의 노력에 따르기 때문에 부의 측정 기준은 토지 소유의 다소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 된다. 따라서, 농민들이 노력을 더 하게 되면 지리(地利) 즉, 토지의 이용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자산이 풍족해진다. 백성들의 자산이 풍족해지면 풍속이 순박하고 후해지며 효제(孝悌)의 윤리 도덕이 확립된다고 주장한다.

부족한 농업 인구와 농업 기술의 낙후는 유식양반(游食兩班) 즉, 기존의 생산 없이 놀고 먹는 양반들을 통해서 해결한다. 소비자들이었던 유식양반들이 생산자로 전환됨으로써 이중으로 효과를 보게 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을 잘 활용하면 농업 기술의 진보도 기대할 수 있다. 그 결과, 국가와 농민 사이에 있는 대토지 소유자들이라는 중간 착취자가 없어지기 때문에 농촌의 부는 국가 재정과 농민의 생활을 넉넉하게 만들 수 있다.

정약용은 ‘농자득전(農者得田)’의 원칙을 비롯해서 유형원『반계수록』에서 서술했던 것을 상당 부분 수용하지만 동시에 차이점도 보여 준다. 『반계수록』에서는 각 직역마다 수전을 분배하되 왕실, 사류층에 대해서는 우대하여 지급하고 각종 직역 담당자에게도 지급하며 직역의 대가로 병역을 면제한다. 상업 진흥책의 일환으로 중앙과 지방 관청이 설치한 상설 점포인 포자(鋪子)를 설치하되, 이들 상인층에게도 토지를 지급하며 세를 거둔다.

반면에 정약용은 농민이 아닌 사 계층이나 공상층 등에게는 농지를 지급하지 말도록 하고 대신 농민을 돕는 방법을 통해 그 대가를 1일당 10일치로 환산하여 분배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천하 만민을 전문화시키고 나아가 분업화를 통해 사회 생산력을 높이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유형원에게서는 볼 수 없던 주장이다. 19세기에 걸맞는 생산력 증대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여전제는 여러 가지 긍정적 효과를 예상할 수 있다. 첫째로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하며〔耕者有田〕, 둘째로 토지 소유는 공유(共有)로 하여 사유 토지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土地共有〕. 셋째로 토지의 경작은 공동으로 하며〔共同耕作〕, 넷째로 생산 곡물은 공동으로 수확하며〔共同收穫〕, 다섯째로 수확 곡물은 노동량에 따라서 분배하도록 하였다.

여전제는 단순한 전제 개혁론이라기보다 다분히 공상적, 농민적 사회주의 사상을 내포하는 정치 · 경제 · 문화 전반에 걸친 정약용의 개혁 사상의 총체적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단행본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서해문집, 2011)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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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원동, 「다산(茶山)의 전정론고(田政論考)」(『류홍렬박사회갑기념논총(柳洪烈博士回甲紀念論叢)』,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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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宗根, 「茶山丁若鏞土地改革思想考察-耕作能力應じた土地分配を中心として-」(『朝鮮學報』 28, 朝鮮學會, 1963)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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