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답파여행 ()

현대문학
작품
1917년, 이광수(李光洙)가 한반도 중남부를 답사하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京城日報)』에 각기 한국어와 일본어로 연재한 기행문.
작품/문학
발표 연도
1917
간행 연도
1939
작가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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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오도답파여행」은 이광수가 1917년 한반도 중남부를 답사하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각기 한국어와 일본어로 연재한 기행문이다. 『매일신보』에 국문으로 53회, 『경성일보』에 일문으로 35회 연재되었다. 경성을 출발해 공주, 부여, 군산, 전주, 이리, 광주, 목포, 삼천포, 진주, 통영, 부산, 마산, 대구를 거쳐 경주에 이르는 한 달 남짓의 여정을 담고 있다. 식민 통치의 효과를 선전하기 위한 관제 기행문으로 기획되었으나, 식민지 개발로 인한 한일 양민족의 불평등 심화를 비판하고 차별 철폐를 촉구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정의
1917년, 이광수(李光洙)가 한반도 중남부를 답사하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京城日報)』에 각기 한국어와 일본어로 연재한 기행문.
저술 및 발간 경위

이광수『무정』의 연재를 끝마칠 무렵 『매일신보』 감사였던 나카무라 켄타로[中村健太郞]가 이광수에게 ‘시정(施政) 5년의 민정(民情) 시찰’을 위한 기행문을 청탁했다. 당시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이던 이광수는 이 청탁에 응하여 여름 방학 두 달 동안 강원, 경상남북, 전라남북 5도를 도보로 답파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무더위와 일정의 촉박함으로 도보 여행을 포기하고, 목포에서 이질로 2주 가까이 입원하면서, 실제 여행은 6월 26일에서 7월 10일까지, 그리고 7월 21일에서 8월 18일까지 한 달 남짓 동안만 이뤄졌다. 또 강원도를 대신하여 부여, 공주 등 충청도 답사를 여행기에 넣었다.

재조(在朝) 일본인 신문인 『경성일보(京城日報)』도 뒤늦게 이 기획에 동참하여, 6월 26일에는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나란히 「오도답파여행」의 연재를 알리는 「사고(社告)」가 실렸다. 그 후 「오도답파여행」은 『매일신보』에 1917년 6월 29일에서 9월 12일까지 국문으로 53회, 『경성일보』에 동년(同年) 6월 30일에서 9월 7일까지 일문으로 35회 동안 연재되었다. 처음에는 이광수 자신이 두 언어 모두 직접 작성했으나, 목포에서 입원 이후 재개된 다도해와 경주 기사 등은 이광수가 일본어로 쓰고 『매일신보』 기자 심우섭이 국문으로 번역하였다. 심우섭의 번역은 ‘彼’(그), ‘余’(나) 등의 대명사를 사용하고 문체가 이광수에 비해 옛스러웠다.

『매일신보』의 국문본 「오도답파여행」은 1939년 영창서관(永昌書館)에서 간행한 이광수 기행문집 『반도강산(半島江山)』에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와 함께 수록되었다. 최정희가 심우섭의 번역 문체를 좀더 현대적으로 수정하고 일부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삭제했다. 우신사판 『이광수전집』에는 『반도강산』본이 수록되었다.

특징

세 가지 판본의 「오도답파여행」은 단순히 언어나 문체뿐 아니라 내용상의 차이도 적지 않다. 『매일신보』판과 『경성일보』판은 각기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독자를 대상으로 삼아 의도적으로 특정 내용을 더하거나 뺐다. 예컨대, 『경성일보』판에는 일본인을 향해 조선에 대한 차별 철폐와 발전 방안을 제시하는 내용이 첨가되었다. 한편 전시 체제와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이 강화되었던 1939년에 재출간된 『반도강산』판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불평등이나 조선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삭제하고 있다.

구성과 내용

「오도답파여행」은 경성에서 경주까지 이어지는 한 달 남짓의 여행 기록으로 각 지역의 ‘명승고적’, ‘산업’, ‘풍속세태’, '인물'을 관찰하고 감상을 덧붙인 전형적인 기행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여정은 경성을 출발(6.26)하여, 공주, 부여, 군산, 전주, 이리, 광주, 목포, 삼천포, 진주, 통영, 부산, 마산, 대구를 거쳐 경주(8.16~18)에서 마무리된다.

〈명승고적〉 부여, 경주 등 옛 도읍지에서 맥수지탄(麥秀之嘆)을 읊거나 충무공 이순신 유적지에서 고금의 한일 관계가 변한 것을 씁쓸하게 회고한다.

〈산업〉 호소카와[細川] 농장 등 각 지역의 산업을 시찰하고 조선 산업의 발전 방안을 논한다. 일본의 대자본이 유입되어 조선 상공업을 일으킬 것, 조선의 미술 공예를 발전시킬 것, 소작민에게 저리로 대출해주는 금융 기관을 설립하여 중추 계급으로 양성할 것, 다도해에 삼림을 조성하고, 수산 강습소를 설치할 것 등을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풍속세태〉 조선의 붉은 산, 말라버린 하천, 초라한 가옥을 보며 안타까워하거나, 상투 차림의 공주가 유카타와 게다 차림의 공주로 변하고, 진주에 비어홀과 창녀촌이 성행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인물〉 경성을 출발하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시마무라 호게츠[鳥村抱月]에게 조선문학의 발전 방안에 대한 충고를 듣고, 충청남도 도장관에게 시정 방침인 계발주의에 관해 설명받는 등 다양한 인물과의 만남이 기록되었다.

의의 및 평가

「오도답파여행」에 대해서는 ‘국토의 관념’을 통해 ‘민족의 자기구성’에 이바지했다는 평가와 식민 통치의 성과를 선전하는 관제 기행문이라는 평가가 공존해왔다. 상반된 평가는 이광수의 글쓰기 자체가 지닌 양면성에서 기인한다. 이광수는 「오도답파기행」을 통해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매일신보』 측의 기획에 부응하면서도, 이를 통해 조선의 실제 현실을 파악하고 일제를 향해 조선의 산업 발전이나 차별 철폐 같은 요구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정 홍보라는 기획 아래 가는 곳마다 도(道)장관, 군수, 금융조합장 등의 접대를 받고 헌병대, 경찰서의 안내와 호위를 받는 여행은 이광수에게 내적 갈등과 번민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진주의 미즈마[水間] 경무부장은 식민 통치의 성과를 과시하면서 이런 물정을 모르고 불온사상을 품는 이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처분해야 한다며, 이광수를 노골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결국 이 글은 제국에 일정 정도 협력하면서도 그 안에서 피식민자의 권익 향상과 처우 개선을 도모했던 식민지 지식인의 균열된 내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이광수, 「오도답파여행」 (『매일신보』, 1917.6.29.~9.8.)
이광수,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일본어) (『경성일보(京城日報)』, 1917.6.30.~9.7.)
이광수, 『반도강산』 (영창서관, 1939)

논문

구인모, 「국토순례와 민족의 자기구성」 (『한국문학연구』 27,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4)
심원섭, 「‘일본제 조선기행문’과 이광수의 『오도답파여행』」 (『현대문학의 연구』 52, 한국문학연구학회, 2014)
정혜영, 「오도답파여행과 1910년대 조선의 풍경」 (『현대소설연구』 40, 한국현대소설학회, 2009)
최주한, 「이광수의 이중어 글쓰기와 『오도답파여행』」 (『민족문학사연구』 55, 민족문학사연구소, 2014)
하타노 세츠코, 「일본어판 「오도답파여행」을 쓴 것은 누구인가」 (『상허학보』 42, 상허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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