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영 ()

근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관련 사건
황해도방곡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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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1863년(철종 14)에 부응교를 거쳐 이듬해 사간이 되었다. 그 뒤 1871년(고종 8) 이조참의, 1874년 좌부승지, 1878년 예방승지, 1881년 이조참판, 1882년 동의금(同義禁), 1883년 대사헌, 1885년 도승지와 보덕, 1886년 형조판서, 1888년 우참찬 등의 내직에서 근무하였다.

외직으로는 1888년 경기관찰사와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황해도관찰사의 재임시에 장산곶과 장연부의 오차진(吾叉鎭)이 지리적 요충지로서 병력증원과 이들에게 재정적 지원에 충실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연안부남대지(延安府南大池) 건설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890년 이후부터 방곡령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일본인 2명이 김천조포(金川助浦)지방에서 대두(大豆)를 매점하여 인천으로 운송하려는 것을 금지시켜, 이른바 황해도방곡사건을 일으켰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뒤 1891년에는 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거쳐, 1892년에는 이조판서와 대사헌을 지냈다. 1894년 8월 28일(음)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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