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오한경(吳漢卿). 자는 월수(月叟).
1260년(원종 1)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동궁시학(東宮侍學)이 되었고, 이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남경사록(南京司錄)·중서주서(中書注書)를 역임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초에 첨의사인(僉議舍人)·금녕부사(金寧府使)·군부총랑(軍簿摠郎)·경사교수(經史敎授)를 지냈다. 금녕부(金寧府)를 지킬 때 임기가 차서 군부총랑에 제수되었는데, 임명장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임기가 찼으니 머무를 수 없다 하고 떠났다.
얼마 안 있어 안렴(按廉) 유현(劉顯)이 금녕부에 있다가 도적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부중(府中)이 모두 국문을 당하였으나 홀로 면하였다. 그 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사림원학사(詞林院學事)·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으며, 이해 왕명으로 제궁(諸宮) 및 내료(內僚)의 이름을 고치고 또 궁주(宮主)를 옹주(翁主)로 고치는 등의 일을 주관하였다.
뒤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지선부사(知選部事)로 치사(致仕: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남)하였다. 학문이 높고 박식하여 큰 흐름을 알았고 장자(長子)의 기풍이 있었으므로 여러 요직(要職)을 역임할 수 있었다.
시호는 문온(文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