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학훈도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사역원에 속한 일본어 역관으로, 일본어 통역과 왜학생도의 일본어 교육을 담당한 관리.
제도/관직
설치 시기
1393년(태조 2)
폐지 시기
1510년(중종 5)
소속
사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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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왜학훈도는 조선시대에 사역원에 속한 일본어 역관으로, 일본어 통역과 왜학생도의 일본어 교육을 담당한 관리이다. 1393년(태조 2)에 정9품 관직으로 사역원에 2명을 두고, 왜학생도의 일본어 교육을 담당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 조선 정부는 사역원 외에 외임(外任)으로 종9품직의 왜학훈도를 부산포와 제포에 파견하여 일본인들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사역원 소속으로 동래부에 파견되어 동래부와 왜관 간의 의사를 중개하고 통역을 담당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사역원에 속한 일본어 역관으로, 일본어 통역과 왜학생도의 일본어 교육을 담당한 관리.
설치시기

1393년(태조 2)에 일본어 통역을 담당할 왜학(倭學) 역관의 양성과 조선에 건너오는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사역원에 2명을 두었던 것이 시초이다. 사역원 소속의 왜학훈도는 2원으로 참상관(參上官)에서 골라서 임명하였으며, 임기는 30개월이며, 훈상청(訓上廳)에서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임무와 직능

이들은 외임(外任)으로 제포와 부산에도 파견하였는데, 제포에 파견된 왜학훈도 1인은 일본인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나 1510년(중종 5)에 없애버렸다. 부산의 1인은 왜관의 일본인들을 접대하고 왜학생도를 가르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며, 왜학의 교회(敎誨)를 임명하였다. 왜학훈도는 왜관과 관련한 공적인 업무를 주관하였으며 상근직이었다.

조선 후기에 왜학훈도의 왜관 배치는 임진왜란 직후 국교를 재개하고 두모포 왜관을 건립하기 위해 동래부와 왜관을 연결할 매개자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 사역원에서 정식 교육과 훈련을 마친 사람이 임명되었다. 교회를 차송하였고 변정(邊情)을 전담하여 관리하였으며, 별차와 함께 왜관에 상주하면서 대일 외교 및 무역 관련 업무에 종사하였다.

훈도는 별차와 함께 왜관의 일본인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면서 대일 교섭, 고무역의 교섭과 무역품의 검수[간품(看品)]을 담당하였고, 사무역인 개시무역에도 참여하였다. 훈도는 배통사(陪通事), 소동(小童), 사령(使令), 시한(柴漢) 등 10여 명 전후를 거느렸다.

의의 및 평가

동래부 소속 왜학훈도는 왜학별차와 함께 양역(兩譯)으로 묘사되어 왜관 운영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조선측이 결정한 사실을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왜학훈도는 동래부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왜관을 상대하는 실무적 책임자로, 조선시대 조일외교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외교 실무자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통문관지(通文館志)』

단행본

정광, 『사역원 왜학 연구』(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0)

논문

이상규, 「17~18세기 동래부에 파견된 왜학 역관(훈도·별차)의 기능」(『청계 사학』 14, 청계사학회, 1998)

인터넷 자료

부산역사문화대전(http://www.busan.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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