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외임(外任)으로 제포와 부산에도 파견하였는데, 제포에 파견된 왜학훈도 1인은 일본인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나 1510년(중종 5)에 없애버렸다. 부산의 1인은 왜관의 일본인들을 접대하고 왜학생도를 가르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며, 왜학의 교회(敎誨)를 임명하였다. 왜학훈도는 왜관과 관련한 공적인 업무를 주관하였으며 상근직이었다.
조선 후기에 왜학훈도의 왜관 배치는 임진왜란 직후 국교를 재개하고 두모포 왜관을 건립하기 위해 동래부와 왜관을 연결할 매개자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 사역원에서 정식 교육과 훈련을 마친 사람이 임명되었다. 교회를 차송하였고 변정(邊情)을 전담하여 관리하였으며, 별차와 함께 왜관에 상주하면서 대일 외교 및 무역 관련 업무에 종사하였다.
훈도는 별차와 함께 왜관의 일본인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면서 대일 교섭, 고무역의 교섭과 무역품의 검수[간품(看品)]을 담당하였고, 사무역인 개시무역에도 참여하였다. 훈도는 배통사(陪通事), 소동(小童), 사령(使令), 시한(柴漢) 등 10여 명 전후를 거느렸다.
동래부 소속 왜학훈도는 왜학별차와 함께 양역(兩譯)으로 묘사되어 왜관 운영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조선측이 결정한 사실을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왜학훈도는 동래부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왜관을 상대하는 실무적 책임자로, 조선시대 조일외교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외교 실무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