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형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흥민(興民), 호는 운사(雲沙). 아버지는 강진태(姜鎭泰)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박희묵(朴希默)의 딸이다. 1885년(고종 22)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갑오경장·을미사변 등의 사건을 겪은 뒤로는 산수에 노닐고 시주(詩酒)로 자위하며 세사를 잊고 살았다.
손자 강신억(姜信憶)이 강준형의 유고를 모아 1965년에 간행하였다. 1965년에 쓴 송조빈(宋朝彬)의 서문과 강신억의 발문이 있다.
불분권 1책. 석인본.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오언절구 10수, 오언율시 20수, 칠언절구 98수, 칠언율시 239수 등 360여 수의 시와 제문 1편, 그리고 부록으로 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주로 산수와 누대를 찾아 노닐며 자연의 풍치와 자신의 심회를 읊은 것, 주변의 인사들과 교유하며 시사(時事)를 논한 것 등이 대부분이다.
이 가운데 「과합천해인사홍류동(過陜川海印寺紅流洞)」은 신라 말에 어지러운 세속을 피하여 홍류동에 은거하였던 최치원(崔致遠)의 고사를 생각하고,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서글픈 심회를 읊은 것이다. 「임오납월우굴별시회위견회(壬午臘月又屈別試會圍遣懷)」는 1882년에 실시된 별시에서 낙방한 뒤의 심정을 그린 것이다. 「을유회중희이작(乙酉會中喜而作)」·「을유회시괴중희이작(乙酉會試魁中喜而作)」 등의 시는 1885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그 기쁜 심경을 묘사한 것이다.
강준형은 윤자신(尹滋臣)·정대무(丁大懋)·최석량(崔錫良)·최헌영(崔憲永) 등과 주고받은 시율이 많다. 그 가운데 최헌영은 장안에까지 시명을 떨친 사람으로 시사(詩詞)에 뛰어나다고 하였던 점으로 보아 서로 의기가 투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산송(山訟)관계로 안의에 달포 가량 머물며 그곳에 사는 최헌영과 깊은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차홍극영서운(次紅屐詠鼠韻)」은 최헌영의 운을 따라 관동의 군도를 쥐에 비유하여 읊은 시이다. 「상회음(傷懷吟)」과 「조상척유음(遭殤慽有吟)」은 모두 자녀를 잃고 그 슬픈 심정을 읊은 것이다. 각각 22수와 13수의 장편으로 된 이 시는 자식의 죽음에 가슴 아파 하는 부정이 구절마다 사무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