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울릉도 일원에 분포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8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무덤군.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군
건립 시기
남북국시대(8세기~10세기)
관련 국가
통일신라
소재지
경상북도 울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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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울릉도고분군(鬱陵島古墳群)은 울릉도 일원에 분포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8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무덤군이다. 이 고분군은 비탈진 곳에 돌을 쌓아 평탄면을 만든 후, 돌을 사용하여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덮어 분구를 만들었다. 울릉도의 지질과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만든 매우 독특한 유적이다.

정의
울릉도 일원에 분포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8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무덤군.
발굴경위 및 결과

울릉도 지역의 고분은 1917년에 간단한 현지 조사가 이루어졌고, 1957년, 1963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지표 조사와 부분적인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후 1997∼1998년 서울대학교박물관, 1998년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2001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현,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 등에 의해 지표 조사가 이루어졌다. 2001년도의 지표 조사에서 고분군은 26개소가 확인되었다. 이후 2007년에 중앙문화재연구원(현, 중앙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남양리 폐고분 1기가 조사되었다.

1957년, 1963년에 실시한 국립박물관의 조사에서 현포리 38기, 천부리 7기, 남서리 37기, 남양리 2기, 태하리 2기, 사동리 1기를 비롯하여 총 87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나, 이 중 발굴 조사된 고분은 수 기에 불과하고, 많은 고분들이 개발로 인해 없어졌다. 실측 또는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고분군으로는 현포리 · 천부리 · 남서리 · 남양리 · 남양2리 · 저동리 · 사동리 · 태하리 · 나리고분군 등 9개소이다.

형태와 특징

울릉도의 고분은 비탈진 곳에 축대를 만들고 축대 안쪽 부분에 돌을 쌓아 바깥 모양을 갖추었다. 내부에 돌을 채워 평탄하게 지면을 정지한 후, 돌방을 만들고 주변에 돌을 채워 넣어 사방의 봉분을 만들었다. 그 다음 뚜껑돌을 덮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완성하였다. 재료와 형태가 같은 시기 육지의 고분과 차이가 있어 주목의 대상이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울릉도의 고분을 석장(石葬)으로 표기하였고, 적석총, 돌무지무덤, 봉석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봉분의 평면은 타원형이 기본이고, 반원형 · 타원형 · 장방형 · 방형, 장방형과 반원형이 결합된 형태로 구분하거나, 도핵형(복숭아씨형) · 타원형 · 역∩자형 · 배모양인 주형(舟形)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돌방은 돌을 쌍아 만든 평탄면에 자리하여 지상식이 대부분이다. 돌방은 추가장이 가능한 구조인데, 앞트기식돌방 또는 굴식돌방으로 파악되기도 하였다. 돌방 구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고분으로는 남서리 3 · 11 · 15 · 21 · 29호분, 현포리 1 · 14 · 16호분, 천부리 1 · 2호분, 남양리 1호분, 남영2리 1∼5호분 등 19기이다.

고분의 구조는 출입시설이 있는 부위의 뚜껑돌 1매 또는 2매가 다른 뚜껑돌보다 낮게 설치되었거나 돌을 수직으로 세워 설치하였다. 이는 뚜껑돌의 높이에 차이를 두어 매장 주체시설의 공간을 구분하고, 그 기능을 표현한 것으로서 굴식돌방의 특징이다. 울릉도의 고분은 널방 · 미석(楣石) · 널길로 이루어진 굴식돌방이거나 굴식돌방 구조의 일부 요소가 변형된 굴식돌방으로 볼 수 있다.

돌을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들거나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돌방은 울릉도의 고분이 경상북도 북부 지역 사람들의 울릉도로의 사민에 의한 직접 이식이거나 울릉도 지질과 기후 조건을 고려하여 울릉도의 특성에 맞게 재구성된 결과로 보기도 한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고분들은 시기가 6세기 전반에서 후반이고, 7세기에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 또는 방형으로 바뀌어 다르다.

울릉도는 신생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종상화산(鐘狀火山)이기 때문에 대부분 절벽을 이루거나 경사가 심한 지형이다. 풍화가 진전되지 않아 토양화가 덜 되어서 봉분을 만들 수 있는 흙을 구하기 어렵지만, 돌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바람이 강하고 강수량이 많은 울릉도의 특성상, 급경사면에 비교적 안정된 봉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돌을 사용하여 돌방을 구축한 후 상부에 돌을 쌓아 올림으로써 울릉도의 자연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고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 유물이 출토된 울릉도의 고분으로는 천부리 1 · 2 · 3호분, 남양리 파괴분, 현포리 9 · 16호분 등 6기이다. 이 고분들에서는 사이부일면편호 · 각진병 · 항아리 · 굽다리사발 · 도장무늬토기 조각 · 적갈색토기 조각 등의 토기류와 많지 않은 구의 금속품이 출토되었다.

토기들은 몸통이나 목 등에 종류가 다양한 도장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토기의 형태 및 문양의 종류와 형태 등이 8세기부터 9세기 통일신라 토기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울릉도 고분에서 출토된 껴묻거리는 울릉도의 생산품이 아니고 육지에서 생산된 반입품으로서 사용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을 가능성도 있다.

의의 및 평가

울릉도의 고분은 울릉도의 지질과 지형, 기후, 그리고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자원과 그것들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경험과 기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울릉도 사람들의 창안에 의해 탄생된 고분 형식이다. 울릉도의 역사와 문화, 육지와의 관계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鬱陵 南陽里 古墳』(中央文化財硏究院 · 獨島博物館, 2009)
『鬱陵島』(國立中央博物館, 2008)
『울릉도 현포리유적 시굴조사』(영남대학교박물관, 2002)
『文化遺蹟 分布地圖-鬱陵郡-』(慶尙北道文化財硏究院, 2002)
『鬱陵島-考古學的 調査硏究-』(서울大學校, 1998)
『鬱陵島 · 獨島의 綜合的 硏究』(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98)
『鬱陵島』(國立中央博物館, 1963)

논문

홍보식, 「통일신라시대 울릉도의 고분 구조와 축조 배경」(『영남고고학』 84, 영남고고학회, 2019)
김하나, 「三國∼統一新羅期 鬱陵島 橫口式石室墳 硏究」(『文物硏究』 17, 동아시아문물연구소, 2010)
이성주, 「울릉도의 고분문화와 신라토기-고대국가 신라하의 한 지방으로서 울릉도 지역문화의 특수성-」(『한반도 고대문화 속의 울릉도-토기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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