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가 멸망한 뒤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은 금이 쇠약해지자 한때 독립하였으나, 다시 몽고족에게 쫓겨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이끄는 유민 일부가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들은 1216년 8월에 압록강을 건너 영주(寧州 : 지금의 평안북도 신의주시)ㆍ삭주ㆍ정주ㆍ융주(戎州)를 침략한 뒤 계속 남하해 영덕성(寧德城 : 영변)을 함락시키고, 철주(鐵州)ㆍ선주(宣州)를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는 중군ㆍ우군ㆍ후군의 3군을 조직하고 상장군 노원순(盧元純), 상장군 오응부(吳應富), 대장군 김취려(金就礪)를 각 군의 병마사로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다음 달에는 조양진(朝陽鎭 : 개천)에서 3군과 갑장별감(甲仗別監) 유성장(劉性藏) 등이 거란군과 싸워 처음으로 승전하였다.
그 뒤로도 연주(連州 : 지금의 평안북도 개천)ㆍ창주(昌州 :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ㆍ구주(龜州 :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 등지에서 거란군과 싸워 이겼다.
이 때 거란군은 창주에서 연주의 개평역(開平驛)과 원림역으로 옮겨 진을 쳤는데, 신기(神騎)의 장수를 보내 이들을 추격해 신리(新里)에서 190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고려의 3군은 연주에 주둔해 원림역을 공격하였다. 우선 광유(光裕)ㆍ연수(延壽)ㆍ주저(周氐)ㆍ광세(光世)ㆍ군제(君悌)ㆍ조웅(趙雄) 등 여섯 장수는 사자암(獅子巖)을 지키게 하고, 영린(永麟)ㆍ적부(迪夫)ㆍ문비(文備) 등으로 양주(楊州)를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이들 아홉 장수가 거란군을 일제히 공격해 76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수많은 말ㆍ노새ㆍ소ㆍ패인(牌印)ㆍ병장기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곧 개평역에 재집결해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후 거란 유민과의 전투는 1218년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완전히 궤멸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