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태는 조선 후기 어의로 『마진편』·『인서문견록』·『실험단방』 등을 저술한 의관이다.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경전과 역사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았다. 어릴 때부터 앓고 있던 자신의 병을 스스로 고친 후 의학에 입문했다. 1680년과 1692년에 홍역이 창궐하자 퇴치에 공헌했다. 홍역치료서 『마진편』(1696)을 저술하여 홍역 치료의 문을 열었다. 40여 년 동안 향의(鄕醫)로 백성들을 치료하고 어의(御醫)로도 활동하였다. 중국의 화타, 편작과 함께 명의로 「강강술래」에 채록되어 있다. 유이태의 치험 사례는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과 같은 명의 설화의 바탕이 되었다.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원(伯源)이고, 호는 신연당(新淵堂) · 인서(麟西) · 원학산인(猿鶴山人) 등이다. 정유재란 때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병장 유명개(劉名盖)의 현손이고, 나라로부터 복호를 받은 효자 유유도(劉有道)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유윤기(劉潤祺)이고, 어머니는 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의립(李義立)의 손녀 강양 이씨이다. 가문과 왕실 기록에는 劉以泰, 저서에는 劉爾泰로 기록되어 있다.
40여년 동안 향의(鄕醫)로 백성들을 치료하고 어의로도 활동하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의(儒醫)로 우리나라 최초의 홍역치료서 『마진편(麻疹篇)』을 저술하였다.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류의태 · 柳義泰)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소년기(1652∼1670)에는 학문을 배우며 부모에게 극진한 효행을 실천하였다. 어릴 때부터 앓고 있던 자신의 병을 스스로 고친 후 의학에 입문하여 3년 만에 의술을 터득하여 의원이 되었다.
청년기(1671∼1690)에는 의술이 널리 알려져 영호남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술을 펼쳤고,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의창(義倉)을 주관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하였다.
장년기(1691~1709)인 1680년과 1692년에 대홍역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홍역치료서 『마진편』(1696)을 저술하였다. 그밖에도 경험방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1709), 『실험단방(實驗單方)』(1709), 1940년대 초반 화재로 소실된 침구방과 부인방, 1975년 분실된 의서 2권 등을 저술하였다.
노년기(1710∼1715)에는 한양에서 의술활동을 하다가, 1710년과 1713년 의약에 동참하여 어의가 되었다. 어의로 숙종의 병을 고친 후 숭록대부 안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향리인 산청으로 돌아왔다.
유이태는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경전과 역사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아 사회에 헌신하는 길을 걸었다. 바른 길을 걷는 정도(正道),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시도(施道), 병의 근원을 탐구해 증세에 따라 처방하고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도(醫道), 절제를 통해 건강을 관리하는 수도(壽道) 등을 실천했다.
“계절에 따라 음식을 섭생하여 몸을 튼튼하게 하며 소식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라. 병을 예방하되 발병 초기에 신속히 치료하고 완쾌한 이후에는 철저하게 건강을 관리하라. 마음을 다스리고 노여움을 경계하라. 약의 오남용을 경계하고 의원의 처방에 따라 약을 복용하며, 기존 처방에만 따르지 말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처방하라.”는 건강관리법을 백성들과 의원들에게 주창했다.
일생동안 백성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에 중국의 화타, 편작과 함께 「강강술래」에 채록되어 있으며, 치험 사례들은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과 같은 명의설화가 되었다.
유이태의 의학사상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인생관은 ‘사친지의(事親知醫), 제중인심(濟衆仁心)’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어버이를 공경하기 위해 반드시 의학을 알아야 하며, 자손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돌보아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 정신관은 ‘무귀무천(無貴無賤), 무친무소(無親無踈)’로 요약되는데, 이는 남녀노소 · 귀천 · 친소 · 민관 · 빈부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백성들을 보살피며 사랑하는 위민(爲民) · 애민(愛民) 정신을 펼치는 것이었다.
셋째, 수기관은 ‘존양천리(存養践履), 성실불구(誠實不苟)’로 요약되며, 이는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여 편안하게 하고 본심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넷째, 학문관은 ‘공리후세(功利後世), 보상일신(補償日新)’으로 집약되는데, 이는 후세에 공(功)과 혜택을 넘기고 후학들이 새로운 치법을 만들어 의학이 날마다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치병관은 ‘미병절선(未病節宣), 선조후치(先調後治)’로 집약되는데,이는 건강할 때 절제하는 생활로 병을 예방하고, 발병하면 근원을 찾아서 신속히 치료하며, 완치 후에는 철저히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의약관은 ‘향정비약(鄕井備藥), 단방수록(單方隨錄)’으로 요약되며, 이는 자연환경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향약재를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 · 채록하고, 치험 사례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전통적인 향약의학의 성격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유이태는 전염병 홍역이 창궐하자 퇴치에 공헌하였으며,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최초로 저술하여 조선의 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다. 의학 발전과 예방으로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고 환자 치료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한국 유의의 전범(典範)을 제시하였고, 참된 의사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의술의 윤리도덕을 확립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