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군옥(君玉), 호는 하빈옹(河濱翁). 영의정 윤방(尹昉)의 손자로,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선조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이다.
1619년(광해군 11) 20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설서를 거쳐 시강원사서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수원부사가 되었을 때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 덕화(德化)와 상호협조를 위한 교조(敎條)를 만들어 백성에게 도덕을 선양하여 교화시키고 지방자치정신을 배양하는 데 힘썼다.
또한, 부병(府兵) 3,000명을 새 장정으로 교체하고 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군기(軍器)를 정비하여 군사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균관으로 달려가 생원들과 힘을 합하여 동무(東廡)·서무(西廡)에 모신 선현의 위패를 산에 묻고, 다시 오성(五聖)·십철(十哲)의 위패를 남한산성으로 모셔 분향행례를 계속하였다. 뒤에 예조참판을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1638년 할아버지 윤방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모시고 간 사위(社位) 40여주 가운데 왕후의 신위 하나를 분실한 책임이 논죄되고 그 죄목으로 할아버지가 황해도 연안으로 귀양가게 되어 속죄의 뜻으로 관찰사의 사직을 주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경기감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유학을 몸소 실천한 유학자로 글씨도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