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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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조선시대 군현제도가 시행되던 과정에서 형성된 말단 지방행정의 중심 취락. 읍성취락.
이칭
이칭
읍성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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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군현제도가 시행되던 과정에서 형성된 말단 지방행정의 중심 취락. 읍성취락.
개설

읍취락은 근세 500년을 통해서 유지된 지방행정 중심지이다. 이 취락은 조선시대 지방 제도에서 정해진 것으로, 현재 「지방자치법」에 규정되어 있는 읍과는 개념이 다르다.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제도는 1413년(태종 13)의 개혁이 있은 뒤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이 개혁에서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4부(府), 4대도호부(大都護府), 20목(牧), 43도호부, 82군(郡), 125현(縣)을 두었다. 이 부·목·군·현의 소재지가 읍취락이다. 읍취락의 수는 대개 330개 전후를 유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적 체제하에서 전국에 산재하였던 330여 개의 읍치의 입지 및 경관구성 방식은 일관성이 있었다.

내용

조선시대의 읍취락은 대체로 성곽에 입지하였기 때문에, 읍성취락(邑城聚落)이라고도 불린다. 근세 주요 읍성취락으로는 낙동강 유역에 김해·창원·창녕·인동·성주·동래·칠원·초계·양산·의령·현풍·선산·고령, 한강·임진강 유역에 강화·통진·풍덕·파주·광주·김포·교하·부평 등이 있었다. 그리고 대동강 유역에 평양·용강·강동·중화·강서·삼화, 압록강 유역에 의주·삭주·창성·초산·위원·강계 등이 있었다.

읍취락은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 배산임수의 지형에 입지하였고 입지 장소는 평지·산기슭·산간(山腹) 등인데, 이 가운데 산기슭에 입지한 경우가 지배적이다. 조선 초기에 입지한 읍치는 풍수적 국면이 약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 새로 들어선 읍취락이나 위치를 이동하여 새로운 읍취락으로 성장한 곳은 풍수적 지향성이 매우 강하였다. 읍취락의 형태는 가옥의 밀도가 높은 집촌을 이루었으며, 도로는 국도를 제외하고는 불규칙적이었고, 읍내의 도로 양변에 가옥이 배열하여 가촌(街村)의 형태를 이루었다.

내부 구조를 보면 관아를 중심으로 주변에 민가가 모여 취락을 이루었다. 중심 관아에는 주건물인 동헌을 중심으로 부속 기관이 있었다. 부속 기관에는 외동헌을 중심으로 독청·사령청·관청·집사청 등이 있었고, 그 주위에 객사·향청·옥사·훈련청·향교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아의 서·남·북에는 사직단, 성황사(城隍祠)·여단(厲壇) 등이 각각 위치하였다.

읍취락의 핵심적 기능은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종사하던 관리의 규모가 서원(書員)·일수(日守)·나장(羅將)·차비군(差備軍)을 합하여 최대 124인에서 최소 62인에 이르렀다. 동시에 군사취락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취락의 주위에 성벽을 구축하고 참호를 파서 방어 기능을 강화하는 등 군사적인 시설을 하였고, 읍성 가까이에 산성을 둔 경우도 있다.

고려 말에 왜구의 발호가 특히 심했던 해안 지방과, 삼국시대 이래 분쟁 지역이었던 국경 지역에서 조선 초기 각종 성곽을 만들었는데, 읍성의 구실을 한 성이 8도에 190기(基)가 있었다. 읍은 행정 및 군사적 기능 외에 주변 지역에 대한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가지기도 하였다.

읍취락은 갑오경장에 시작하여 국권상실 이후인 1914년까지 성벽이 철폐되었고, 행정구역의 통폐합 및 철도·도로의 개설, 군사시설의 이동에 따라 취락의 지위에 변화를 겪게 되어 대부분의 읍취락이 도시취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도시적 취락으로 발전하지 못하였거나 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인해 사라진 조선시대의 군현을 학계에서는 구읍(舊邑)이라 부른다. 구읍은 농촌적 성격을 가지는 취락으로 전락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촌락지리학』(홍경희, 법문사, 1985)
『조선의 풍수사상』(최창조, 민음사, 1984)
『취락지리학』(오홍석, 교학사, 1980)
「조선시대 지방도시의 풍수적 입지분석과 경관유형」(최원석, 『대한지리학회지』42(4), 2007)
「조선시대 읍치의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예명해·이재환,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지』 37(2), 2002)
「구읍취락에 관한 연구」(이기석, 『지리학』3,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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