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왕릉을 복구하고 군사 보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녹훈된 종실 · 공신.
이칭
이칭
순녕군(順寧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전주(全州)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왕릉을 복구하고 군사 보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녹훈된 종실 · 공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해풍군 이기(海豊君 李耆)이다. 순녕군(順寧君)에 봉해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아버지와 함께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갔다.

다음해에 서울이 수복되자 형조판서 이헌국(李憲國), 원천군(原川君) 등과 함께 조릉사(朝陵使)가 되어 선왕의 능을 순시하였는데, 왜군에 의하여 파괴된 왕릉을 복구하고 참봉과 수호군의 보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정인홍(鄭仁弘) 등에게 동조하여 종척 35인을 거느리고 임해군(臨海君)을 처단할 것을 상소하였고, 1618년 인성군(仁城君)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러한 이경검의 상소는 이이첨(李爾瞻)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이이첨 일당이 제거되면서, 무림군(茂林君)과 함께 원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적소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야승(大東野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