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경(子耕). 할아버지는 이색(李穡)이고, 아버지는 지중추원사 이종선(李種善)이다.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貞順公主)의 사위이다.
1416년 16세의 나이로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에 임명되었다. 태종이 이계린이 젊어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1436년 세종의 명으로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441년 형조참판, 다음 해 경기도관찰사, 1444년 호조참판, 이듬 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446년 대사헌이 되었다.
다음 해인 1447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어, 각 지방의 사정을 살피면서 계속된 가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처참한 것을 보았다. 백성 중에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사례도 있다는 계문(啓聞: 관찰사·절도사 또는 지방에 출장중인 봉명사신이 공무수행 내용을 문서로 아룀)을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임금은 이와 같은 해괴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동부승지였던 아우 이계전(李季甸)에게 하명하였다.
조사가 시작되자 두려움을 느껴 이백강(李伯剛)의 하인 김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계문했다고 말하였다. 이에 형조에서 김간을 문초하니 조수명으로부터 들었고, 조수명은 다시 해주에 사는 복덕이가 자기 집 울타리 밑에 어린이의 머리가 있었다는 말이 와전되어 이계린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황해도를 비롯한 각 지방에서는 굶어 죽은 자가 많아 인심이 흉흉해 이러한 풍문이 났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계린은 풍문만 믿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아 많은 무리를 빚어 파직되었다.
그 뒤 1449년 별시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 관직은 실직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벼슬 길이 열려 같은 해 개성유수, 1451년(문종 1) 지중추부사, 1453년(단종 1)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1454년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력한 아우 이계전과 함께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455년 좌찬성이 되었다. 시호는 공무(恭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