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 또는 묵암(墨巖). 태사(太師) 이도(李棹)의 후손이며, 부여감무 이의(李宜)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현감 이대정(李大種)이고, 아버지는 이영(李潁)이며, 어머니는 생원 채소명(蔡紹明)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489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설서·검교·정언·집의·좌승지 등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김종직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생을 모아 치른 시험에서 성적이 뛰어나 종이와 붓을 받았을 뿐, 사제 관계는 아님이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1503년 장령이 되었고, 전한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으로 승진했으나, 이듬 해 박경(朴耕)의 옥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곧 억울하게 연루되었음이 밝혀져 풀려나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09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이듬 해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평안도관찰사를 비롯해 호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7년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였다. 이어 좌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를 거쳤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류(士類)들에 대한 처리가 지나치자, 스스로 논의에 맞지 않다고 여겨 김제(金堤)에 있는 농막으로 퇴거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옳고 그름에 명백한 태도를 취했고 군자다운 태도가 있었다 한다. 전주의 서산사우(西山祠宇)와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