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도쿄에서 구본웅(具本雄), 김응진(金應璡) 등과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를 조직하였으며, 1932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1933년 동아일보의 미술기자가 되었다. 1934년에는 목일회(牧日會) 창립에 가담하였고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서 「꽃다발 있는 정물」로 입선하였다. 1938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7회에 걸쳐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39년부터 1961년까지 보성중학교 등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였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종군화가 단장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1951년 대한미술협회 부회장이 되었고,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심사위원으로 피임된 이래 역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58년에는 목우회(木友會)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 정년퇴직 후에는 명예교수로 있었고, 같은 해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사실적 자연주의에 충실한 풍경화를 즐겨 다루었는데, 화풍의 변화가 대체로 1960년을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진다. 1960년 이전의 전기에는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에 기반을 두고 정확한 데생력과 건실한 색감을 바탕으로 하는 화풍을 구사하였다. 후기에는 페인팅 나이프의 짧은 수직선들이 화면을 점진적으로 뒤덮는 일종의 인상파적 점묘법(印象派的點描法)을 통하여 화려한 색감의 화풍을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1933년 작인 「꽃다발 있는 정물」, 1966년 작인 「교회보이는 풍경」, 1968년 작인 「흑석동 풍경」 등이 있다.
1963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7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 1975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