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金瑢俊), 길진섭(吉鎭燮), 구본웅(具本雄), 이마동(李馬銅), 김응진(金應璡)이 1930년 12월에 결성했다. 김용준은 1926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백만양화회가 조직된 다음해인 1931년 2월 졸업을 앞둔 상태였고, 이마동과 길진섭 역시 같은 해 입학한 동기생이었다. 김응진은 도쿄미술학교 유학생이었으며 구본웅은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에 재학중이었다.
1930년 12월 21일자 『조선일보』에는 이들이 결성한 백만양화회의 임시 사무소가 동경시외의 노가타쵸(野方町 下蘆宮 百十四)에 있으며, 제1회 전람회는 1931년 4월중에 경성에서 개최될 예정이라는 기사가 실렸지만, 전람회가 개최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단체를 주도한 인물인 김용준은 유학중인 1927년부터 28년까지 「화단개조」, 「프롤레타리아미술비판」과 같은 비평을 국내에 발표하였고 대구의 ‘영과회전(0科會展)’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0년에 김용준은 도쿄미술학교 동문들과 함께 동미회(東美會)를 조직하여 대표를 맡아 전시회를 개최하는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그해 말에는 백만양화회를 조직했다.
1936년에 김환기와 길진섭이 일본인 츠루미 타케나가(鶴見武長), 칸노 유이(菅能由爲), 후타코시 미에코(船越三枝子)와 동경에서 결성한 단체인 ‘백만회(白蠻會)’와는 구분된다.
중심 인물인 김용준이 쓴 선언문에 해당하는 글을 통해서 이들이 지향한 미술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김용준은 1930년 12월 23일 동아일보에 「백만양화회를 만들고」를 실었다. 김용준은 “가장 위대한 예술은 의식적 이성의 비교적 산물이 아니요, 잠재의식적 정서의 절대적 산물인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또한 피카소, 샤갈, 루오, 블라맹크, 고흐와 쉬르리얼리즘, 포비즘, 칸딘스키의 정신주의 등을 거론하면서 “열정의 고흐, 다색의 피카소, 백만(白蠻)의 무리들은 이들 선구자의 족적을 밟아 다시 기원전의 사막을 밟으려 한다”고 선언했다. 김용준은 당시 화단의 담론을 주도했던 프롤레타리아 미술론을 배격하고 서양의 현대 미술 사조들인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을 자유롭게 따를 것을 주장했다. 또한 “우리들은 가장 비극적 신(scene)을 장식하기 위하여 가장 예술적으로 생활하고 가장 신비적으로 사유하고 가장 세기말적으로 제작한다”라고 하였고, “우리들의 주조(主潮)는 극도로 신경쇠약적이요, 또는 세기말적 퇴폐성이 농후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잠재의식이 그곳에 향락을 구하게 하는 소이(所以)라 하겠다”라고 하였던 부분에서는 서양의 세기말 신비주의와 데카당한 감각에 경도되었던 점도 보여주었다.
카프(KAPF)계열의 작가인 정하보(鄭河普)가 이 글에 대한 비판을 『조선일보』에 실었는데, 그는 이들의 미술을 ‘쁘띠 부르주아’의 미술로 치부하고 조선 프롤레타리아가 성장하면 몰락하게 되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