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상 이모작의 대상경지가 논과 밭 어느 것에 한정된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대체로 논에 대한 것을 의미한다. 논은 일모작 · 이모작 논으로 구별하고 있지만 밭은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의 논 이모작에 관한 기원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인구증가와 더불어 식량을 조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된 것 같다.
이와 같은 근거는 15세기 초에 저술된 정초(鄭招)의 『농사직설』이나 15세기 말에 저술된 강희맹(姜希孟)의 『금양잡록(衿陽雜錄)』 등 중요한 농서에 논의 이모작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7세기 초에 허균(許筠)이 편찬한 『한정록(閑情錄)』의 치농조(治農條)에 비로소 보리를 논의 이모작으로 재배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에 저술된 『산림경제』 등 각종 농서에 이모작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우리 나라에서의 논의 이모작은, 겨울철에 보리싹이 얼어 죽을 염려가 비교적 적은 서남해안지방에서 16세기 말경부터 서서히 발전되어 조건이 그리 좋지 않은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까지 보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나라 논의 이모작 면적은 1914년에 13만8686㏊로 총 면적의 약 10.4%를 차지하였고, 1919년 통계에 의하면 24만7254㏊로 총 면적의 16%로 증가하였다. 논 총 면적에 대한 도별 이모작 면적비율을 보면 경상북도 42.2%, 경상남도 37.6%, 충청북도 25.0%, 전라남도 22.9%, 전라북도 및 충청남도는 각각 13.0%였다. 이모작 면적은 점차 증대하여 1937년에는 44만9520㏊로서 논 총 면적의 약 26.2%, 1980년에는 84만4396㏊로서 64.2%를 차지하고 있다.
이모작에서 수도(水稻)와 교호재배되는 작물은 겨울 작물[畓裏作物]과 수도의 앞작물(봄철 작물)로 대별되는데, 그 주된 것은 다음과 같다. 식량사정을 감안할 때 수도와 보리의 조합(組合)은 우리 나라 이모작의 초기에서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그 재배면적이 가장 크다.
답리작 보리는 남부지방에서 쌀과 더불어 한민족을 부양해온 가장 중요한 작물이며, 벼와 보리의 작부방식은 가장 중요한 작부체계이기도 하다. 한편, 화학비료의 공급이 미흡한 때에는 자운영 등 풋거름작물이 재배되었다.
또 경상북도 안동지방에서는 삼(大麻)을 수도 앞작물로 재배하여 유명한 안동포(安東布) 생산이 발달하였다. 1970년경에는 한때 논산과 부여 지방에서 아마가 수도 앞작물로 비교적 많이 재배된 때도 있었다.
현재는 답리작 보리재배면적이 크게 줄고 있으며, 반면에 감자 · 마늘 · 양파, 그 밖의 각종 채소와 유채 그리고 호밀 · 이탈리안라이그래스 등 사료작물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