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 이유번(李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석명(李碩明)이다.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이희선(李喜善)이며, 어머니는 정환(丁煥)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605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의 정자·저작·박사를 거쳐 형조좌랑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평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인 이이첨(李爾瞻)과 뜻이 맞지 않아 승진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때는 병을 빙자하여 벼슬을 그만둔 일도 있었으나, 다시 형조정랑을 거쳐 풍기군수가 되었다.
이때 경상도관찰사로 정조(鄭造)가 임명되자, 정조의 속관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성주로 돌아가 농사와 낚시로 소일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었으나, 장령·집의 등 대간으로 있을 때 직신(直臣)의 기품이 있어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단천군수와 연안군수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신망을 얻고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었다. 이어 병조참지로 있을 때 치군(治軍)·축성(築城) 등 국가방위에 공헌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40여일 동안 대결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간 형 이상길(李尙吉)을 찾아가다가, 도중에서 적병을 만나 살해되었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