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익(仲益), 호는 저로(樗老). 이지시(李之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공랑(啓功郞) 이공려(李公礪)이다. 아버지는 좌랑 이사언(李士彦)이며, 어머니는 부정자(副正字) 김승경(金承慶)의 딸이다.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58년(명종 1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권지로 근무 중 임의로 퇴근해 파직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1564년 박사·전적(典籍), 어천찰방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566년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예조정랑을 거쳐 다시 지평을 역임하였다.
1567년 지평으로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부묘제(祔廟祭)를 거행한 뒤 돌아오는 도중에 정기(呈技: 춤과 노래의 연예)를 관람한 선조를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곧 다시 등용되어 온성부사·종성부사를 거쳐 예조정랑이 되고, 1571년(선조 4) 부수찬으로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8년 황해도감사를 지내고 이어 도승지가 된 뒤 1581년에는 특배로 대사헌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1583년 대사간·대사헌·도승지를 역임했는데, 이 때 이탕개의 난의 책임으로 귀양가서 죽은 북병사 이제신(李濟臣)을 신원(伸寃: 원통함을 품)하게 하였다.
이듬해 도승지·형조판서를 거쳐 1585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판서가 되었다. 1589년 다시 형조판서가 되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평소 『근사록』·두시(杜詩) 및『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 등을 탐독했고, 삶의 역정을 술로써 달래면서 세월을 보냈다 한다. 또한 시사(時事)를 물으면 웃으면서 “그것이 나에게 무슨 관계냐.”고 오히려 반문했기 때문에 ‘하관선생(何關先生)’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