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단례(端禮), 호는 영응선생(永膺先生). 병절교위(秉節校尉) 이필(李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이계장(李繼長)이고, 아버지는 사헌부장령 이언침(李彦忱)이며, 어머니는 홍문관박사 안한영(安漢英)의 딸이다.
스스로 힘써 행할 줄 알았으므로 효성 있는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직언으로 탄핵을 받고 순창군수로 좌천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 곳에서 김인후(金麟厚)의 제자가 되었다.
김인후가 자(字)와 자설까지 지어주었으며, 이 때 이중호(李仲虎)에게도 배웠다. 뒤에 아버지가 서천으로 귀양가 죽자 지성으로 장사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해 나이 20도 못되어 지효(至孝)라는 이름이 널리 퍼졌다.
1572년(선조 5) 학행이 있는 선비를 천거할 때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에 제수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어머니 안씨가 이질(痢疾)을 앓아서 증세가 위급하자 목욕하고 울부짖으며 하늘에 호소했다 한다.
어머니는 차츰 회복되었으나 그는 오랫동안 시탕(侍湯: 약을 써서 병환을 시중함)과 간호에 지쳐서 피를 토하다가 그 해 8월에 죽으니 사람들이 연안의 읍호(邑號)를 따라 ‘영응선생’이라 하였다.
이기직(李基稷)·이기설(李基卨) 두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쌍벽(雙壁)·연주(聯珠)라고 일컬었다. 맏아들 이기직은 아버지의 상사에 지나치게 슬퍼해 23세에 죽고, 시집 안 간 누이도 애통해하다가 18세에 죽으니 향교구동(鄕校舊洞)에 사는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알려, 인조의 특명으로 효자문과 정려가 세워졌다.
따라서 어머니 안씨와 부인 정씨, 아들 이기직·이기설, 딸 모두 그와 더불어 표창을 받아 한 집에 여섯 정문이 세워졌으며, 임금이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 뒤 또 이기설의 아들 이돈오(李惇五)·이돈서(李惇敍) 및 이돈오의 처 김씨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해 모두 정려되어, 여덟 개의 정문이라는 뜻에서 팔홍문(八紅門)이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