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미(子美). 아버지는 판서 이현영(李顯英)이다.
아버지는 근세의 명재상이라는 칭함을 받았다. 이러한 가정분위기에서 학문에 열중하다가 1633년(인조 11) 천거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 재상의 자제를 볼모로 보내야 한다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이조판서의 아들로서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가 7년 만에 돌아왔다.
1645년 장원서주부(掌苑署主簿)가 되고, 1664년(현종 5) 이천부사를 비롯하여 영천군수 등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노인직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된 뒤 용산(龍山) 강사(江舍)에 물러나 풍류를 즐기며 강백년(姜栢年) 등과 교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