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화(林景和)는 안동부(安東府) 관하의 보주(甫州,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 사람으로, 자(字)는 춘경(春卿)이다. 할아버지는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추봉된 임자고(林子高)이며, 아버지는 수사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주국(守司徒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兵部事 柱國)을 역임하고 정평공(貞平公)에 책봉된 임간(林幹)이다. 어머니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 김씨(金氏)로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추봉된 김의선(金義先)의 딸이다. 대부소경 검교호부상서(大府少卿 檢校戶部尙書)를 역임한 임경식(林景軾)과 형제지간이다. 부인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송공(宋公)의 딸이며,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1158년(의종 12)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복무하다가 질병을 얻어 57세로 사망하였다.
11세에 아버지의 음서(蔭敍)로 군기주부동정(軍器注簿同正)이 되었으며, 1127년(인종 5) 봄에 경산부통판(京山府通判)이 되어 행정 능력으로 이름을 떨쳐 치적 평가에서 일등을 받았다. 이후 경령전판관 잡직서령 도병마녹사 대부주부 대부승(景靈殿判官 雜職署令 都兵馬錄事 大府注簿 大府丞)이 더해졌다.
1148년(의종 2) 권지감찰어사(權知監察御史)가 되었으며, 이해 가을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명주(溟州)의 수령이 되었다. 이후 합문지후(閤門祗候),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시어사(侍御史), 고공 · 병부원외랑(考功 · 兵部員外郞) 등을 역임하였다. 중국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후 형부낭중 어사잡단(刑部郎中 御史雜端)이 되었으며, 1157년(의종 11) 이부낭중 태자내직랑(吏部郎中 太子內直郞)에 임명되고,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오르면서 금자(金紫)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1158년(의종 12)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중국 오대송초(五代宋初) 때의 사람 손광헌(孫光憲)이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문 양잠서(養蠶書)인 『손씨잠경(孫氏蠶經)』을 임경화가 이두로 해석하여 바쳤다. 정부에서 이를 받아들여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하였고, 고려의 양잠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임경화의 『손씨잠경』 이두 번역은 중국의 양잠 기술을 고려의 실정과 기술에 맞게 수용한 것으로 해석되며, 중국 기술을 실제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으로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