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1126년(인종 4)에 사망하였다.
1122년(인종 즉위년)에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임명되었다. 당시 이자겸(李資謙)은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고 부르고 스스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칭하며 국정을 전횡하였으며, 자신의 집으로 와 자신을 지군국사에 책봉하라고 책봉 날짜를 정해 인종에게 통보하였다. 이자겸의 지군국사 책봉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자겸의 이러한 행위는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인종은 이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인종을 동궁 시절부터 시종하던 측근 세력인 내시(內侍)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麟)은 인종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지녹연(智祿延)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합의하고, 1126년(인종 4) 2월 당시 상장군(上將軍)이던 최탁(崔卓)을 비롯하여 상장군 오탁(吳卓),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을 불러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의 암살을 모의하였다.
당시 이지원(李之元)의 장인 척준경은 동생 척준신(拓俊臣)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척준신이 하급 관리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승진하여 최탁 등의 상관이 되었으므로, 이에 불만을 품은 최탁 등의 무신들은 이자겸과 척준경 제거 모의에 가담하였다. 최탁 등의 무신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 내시(內侍) 척순(拓純), 지후(祗候) 김정분(金鼎芬), 녹사(錄事) 전기상(田其上)과 최영(崔英) 등을 제거하였다. 최탁 등이 동원한 부대는 2군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자겸과 척준경은 궁궐에 없었으므로 무사하였고, 소식을 전해 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은 군사를 동원하여 반격하여 궁궐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최탁을 비롯하여 인종을 인도하여 남궁(南宮)으로 나오던 안보린 · 권수 · 고석 · 홍관(洪灌) 등은 살해되었으며, 이외에 죽임을 당한 군사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