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봉주(鳳州). 우복야 지채문(智蔡文)의 증손자이다.
음서(蔭敍)로 내알자(內謁者)가 된 뒤 동북면병마판관에 올랐다.
1104년(숙종 9)에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고, 1105년(예종 즉위년)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주부동정(注簿同正)인 은원충(殷元忠) 등과 함께 여진정벌을 위하여 동계(東界)의 산천을 순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장주분도(長州分道)가 되었다.
1107년에는 시어사(侍御史)로서 경상진주도안무사(慶尙晉州道安撫使)가 되어 백성들의 질고를 묻고 수령의 치적을 살폈으며, 1114년 차호부시랑(借戶部侍郎)으로서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가 되었다.
1118년에 이부시랑으로서 다시 동북면병마부사가 되었고, 1120년 서북면병마사에 올랐다. 1125년(인종 3)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이듬해 인종이 이자겸(李資謙)의 전횡을 꺼려하는 것을 알고 내시 김찬(金粲)·안보린(安甫麟),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고석(高碩) 등과 더불어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을 제거하고자 거사하였다.
그리하여 척준경의 아우인 척준신(拓俊臣) 등을 죽이는 등 기선을 잡았으나 조급한 거사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한 뒤 귀양가던 중 충주에서 살해되고 처자는 노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