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질(崔質)의 가계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 1015년(현종 6) 3월에 처형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이 2차 침입하였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서 홍숙(洪淑), 방어사(防禦使) 이원구(李元龜), 부사(副使) 최탁(崔卓), 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 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함께 통주(通州: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를 성공적으로 수비하였다. 변방을 지킨 공적으로 여러 차례 무반 관직에 임명되고, 상장군(上將軍)까지 승진되었으나, 문관이 될 수는 없었기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란과의 전쟁 이후 군비가 증액되어 관리들의 녹봉이 부족하게 되자, 1014년(현종 5)에 중추원일직(中樞院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와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가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관리들의 녹봉으로 충당하자고 건의하였다. 현종은 자신의 옹립에 공을 세운 이들 문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이는 많은 무신들이 불만을 품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최질은 상장군 김훈(金訓) · 박성(朴成) · 이협(李協) · 이상(李翔) · 이섬(李暹) · 석방현(石邦賢) · 최가정(崔可貞) · 공문(恭文) · 임맹(林猛) 등과 함께 영업전을 빼앗겼다고 분노한 무신들을 규합하고,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꾀어 궁궐에 난입하여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결박하고 귀양보내게 하였다. 이후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은 무관 상참관(常參官) 이상은 모두 문관 직을 겸임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로 보아 최질과 김훈이 일으킨 정변은 문반과 무반이 구분된 고려 초기 상황에서 문반 우대에 동의하지 않는 무신들이 벌인 권력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종은 서경(西京)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있던 왕가도(王可道)를 권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으로 임명하여 최질과 김훈 등을 제거할 준비를 하게 한 다음, 다음해인 1015년(현종 6) 3월 서경으로 행차하여 장락궁(長樂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최질 등이 취한 틈을 타 왕가도는 서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최질 등을 제압하였고, 최질은 김훈 · 이협 · 최가정 등 18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최질과 김훈 등을 제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왕가도는 과거 출신자였다. 따라서 이후 왕권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과거 출신 문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높아졌으며, 현종은 왕권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정치 체제 개편을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