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정(崔弘正)의 가계 및 생몰년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105년(예종 즉위년)에 내시지후(內侍祗候)의 관직에 재임하던 중에 병마판관(兵馬判官)에 임명되었다. 이로 보아 최홍정은 숙종(肅宗) 때에 내시(內侍)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17만 병력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할 때 병마판관의 직책으로 참전하였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내시 출신들이 윤관의 여진정벌을 지지하고 많이 참여하였는데, 최홍정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여진정벌 시 최홍정은 윤관의 명령에 따라 병마판관 황군상(黃君裳)과 함께 정주(定州)와 장주(長州)에 파견되어 여진 추장들을 매복 공격하여 임무를 완수하였으며, 이어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林彦)과 함께 여진족이 수비하던 동음성(冬音城)을 공격하여 적을 패주시켰다. 또 병마판관 김부필(金富弼), 녹사(錄事) 이준양(李俊陽)과 함께 이위동(伊位洞)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1108년(예종 3)에 윤관과 오연총이 이끄는 고려군이 가한촌(加漢村) 전투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 이관진(李冠珍) 등과 함께 이를 구원하였다.
1108년(예종 3) 2월에 윤관이 새로 설치한 9성 중 하나인 웅주(雄州)를 수비하던 중, 여진(女眞) 수만 명이 웅주를 포위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 여진을 크게 격파하였다. 5월에 웅주에 대한 여진의 공격이 계속되자 도순검사(都巡檢使)로서 병마검할(兵馬鈐轄) 임언(林彥)과 함께 오연총이 지휘하는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웅주를 방어하였다.
1109년(예종 4)에 9성에서의 철수가 결정되자 행영병마별감 승선(行營兵馬別監承宣)의 지위에 있으면서 병마사 이부상서(兵馬使吏部尙書) 문관(文冠)과 함께 여진의 추장 거위이(居熨伊) 등에게 9성을 반환해 주는 조건으로 충성을 서약받았으며, 길주(吉州)를 비롯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 고려의 백성을 고려 영토 내로 성공적으로 철수시켰다.
1111년(예종 6)에 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급사중 관직을 지닌 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