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계방(季方), 호는 금시당(今是堂). 임열(任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영로(任榮老)이고, 아버지는 좌승지 임연(任兗)이며, 어머니는 정유성(鄭惟誠)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모두 강화에 피난하였으나 그는 패전을 예측하고 가족을 충청도에 피난시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음보(蔭補)로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과 통천군수를 지내고,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직강이 되었다.
효종 초기에 정언·장령·헌납·집의 등의 언관을 거치면서 김자점(金自點)과 그의 당여인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 등을 귀양보내자고 주장하였다.
1652년(효종 3) 동래부사로 재임하면서 일본의 정치와 해선(海船)의 실태를 파악하여 이의 대비책으로 동래부를 금정산(金井山)으로 옮길 것과 견고한 축성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였다.
1655년 승지·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57년 경상도관찰사, 1659년(현종 즉위년) 형조참의·수원부사·평안도관찰사·한성부좌윤·도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 겸 진주부사(謝恩兼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다. 1665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다음해 공조참판 겸 부총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