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건물. 1984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인 유중교(柳重敎)가 1889년(고종 26)에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다.
또 1895년에는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8도유림을 모아 창의(倡義)의 비밀회의를 하던 곳인데, 1906년 유림에서 뒤편에 자양영당을 창건하고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 · 이항로(李恒老) · 유중교 · 유인석 등의 영정을 봉안하고 봄과 가을로 제향하고 있다.
경내에는 입구쪽으로 면하여 목판고가 있고, 이어서 자양서사(紫陽書社)와 영당이 같은 축선상에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제일 뒤편에 있는 자양영당은 내부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깔고 영정을 봉안하는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전면으로는 3칸 모두 4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구조는 외벌대로 쌓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건물의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을 세웠다. 건축양식은 건물의 전면에만 초익공계통으로 꾸미고 후면으로는 간결한 납도리집으로 간략화시켰다. 지붕틀은 1고주(高柱) 5량가구로서, 고주를 쓸 경우 전면 1칸을 개방하여 전퇴공간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하여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종량 위에는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세우고 종도리와 함께 지붕무게를 받도록 하였다. 경내에는 조선말 목판 인쇄술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는 『화동강목(華東綱目)』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1991년에 보수를 한 바 있으며, 건축양식이나 지붕틀의 구조에서 약간의 변형이 있는 조선 후기에 지은 영당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