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은 저고여(著古與) 피살사건을 구실로 삼아 1231년(고종 18)에 고려를 침략하였다. 그해 8월 사르타이〔撒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함신진(咸新鎭: 평안북도 의주)과 철주(鐵州)를 유린한 뒤 안북부(安北府: 평안남도 안주)를 거쳐 개경을 향해 침공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몽골군의 침입에 곳곳에서 대몽항전이 전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가 바로 자주성전투이다.
자주는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인데, 북방으로부터 청천강을 건너온 적군이 서경(西京)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에 위치하였다. 이곳에서 외적과 장기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던 곳이 자모산성(慈母山城)이었다. 이 산성은 둘레가 12,733척(尺, 1척은 35.510㎝, 약 4.5㎞), 높이가 13척(약 4.6m)인 석성(石城)으로 성 안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와 수량이 매우 풍부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자주부사(慈州副使)로 있었던 최춘명(崔椿命)은 고종 18년 11월에 몽골군이 침공하자 주민을 규합하여 12월까지 약 1개월 동안 몽골군의 파상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용전을 벌인 끝에 이를 격퇴시켰다.
당시 고려는 안북부전투에서 정규군과 초적(草賊)으로 구성된 삼군이 몽골군 본진에 패배하자 몽골군 원수 사르타이와 강화를 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몽골과 화친을 꾀하던 최우는 내시낭중 송국첨(宋國瞻)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최춘명이 이에 응하지 않으므로 사르타이는 고려 종실인 회안공 왕정(淮安公 王侹)에게 독촉하였다. 회안공은 대집성(大集成)을 보내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그래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사력이 우위에 있던 고려 관군이 성에 들어가자 이들에게 활을 쏘아 달아나게 하는 등 성을 굳게 지켰다.
이에 최우를 비롯한 조정의 권신들은 몽골의 추궁을 당하고 한편으로는 몽골과의 화친이 성사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최춘명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내시 이백전(李白全)을 보내 최춘명을 참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사르타이 휘하 몽골의 관인이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만류함으로써 참형을 면하였다 한다.
자주성전투는 박서(朴犀)의 구주성전투(龜州城戰鬪)와 더불어 대몽항전 초기(몽골 제1차 침입)에 고려의 변방 수령과 주민이 합심하여 외적에 승리한 전투로서 몽골군 1개부대를 내륙로에 묶어놓아 그들의 남하를 저지시킴으로써 그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