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년(고종 6), 강동성(江東城)의 전쟁이 끝난 뒤 몽골은 고려에 대해 해마다 동진국(東眞國)을 거쳐 사절을 파견하여 과중한 공물(貢物)을 요구해 왔다. 특히,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는 1221년(고종 8)과 1224년(고종 11)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파견되어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편, 몽골에 굴복했던 동진국의 만노(萬奴)는 서역(西域)으로 원정을 나선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소식이 막연한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몽골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후 만노는 1224년 정월에 고려로 사신을 보내서 이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각기 각장(榷場)을 설치하여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고려는 몽골을 배반한 만노를 가까이할 수도 없고 멀리하기도 어려운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그 때문에 고려는 일단 몽골과 동진국 두 나라와 교류를 계속하면서 정세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1224년 11월에 공물을 요구하러 온 저고여가 1225년(고종 12) 정월에 평안북도 의주(義州)의 함신진(咸新鎭)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압록강 강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려는 매우 중대한 외교적 위기에 부닥쳤다.
이는 횡포한 몽골 사신에게 분노한 고려인의 소행일 수도 있지만, 고려와 몽골의 외교적 분쟁을 희망하는 금나라나 동진국의 음모일 수도 있었다. 이들은 고려와 몽골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그들이 고려 영토를 침범할 때도 몽골인의 복장을 하여 몽골의 소행인 것처럼 가장하였기 때문이다. 또, 몽골 사신이 고려에 들어올 때는 통로를 가로막으면서 고려인의 복장으로 종종 습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에서는 저고여 피살사건을 금나라 도둑의 소행이라고 하며 이 사실을 몽골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몽골은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후일 이 사건을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구실로 삼았다.
저고여 피살사건은 고려와 몽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몽골이 동아시아를 제압하기 위해 미리 계획한 군사 행동을 단행하고자 하는 목적이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