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춘명 ()

목차
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자주부사, 추밀원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50년(고종 37)
본관
해주(海州)
주요 관직
자주부사(慈州副使)
관련 사건
제1차 고려-몽골전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후기 자주부사, 추밀원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최충(崔冲)의 후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231년(고종 18) 자주부사(慈州副使)로서 관민을 이끌고 몽고군에 포위된 성을 고수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그 뒤 화의를 맺게 되자 조정에서는 몽고원수 살리타[撤禮塔]의 힐책을 받아 내시낭중(內侍郎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항복을 설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어 삼군장수가 항복하게 되자 살리타는 회안공 왕정(淮安公 王侹)에게 자주(慈州)의 항복을 독촉하였다.

이에 왕정은 후군진주(後軍陳主) 대집성(大集成)과 몽고관리를 보내어 조정과 삼군이 항복한 사실을 알리고 속히 항복하라 하였으나 조지(朝旨)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몽고관리가 대집성으로 하여금 성 안에 들어가 권유하게 하였으나 여러 차례 거부하였다.

이에 처형하라는 몽고관리들의 압력으로 서경에 투옥되자 왕이 재추(宰樞)에게 물으니 모두 감형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집성이 최우(崔瑀)를 움직여 처형하게 하였다. 재추들이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하였으나 유승단(兪升旦)이 홀로 반대하였다.

최우가 거듭 내시 이백전(李白全)을 보내어 처형하려고 하였을 때도 사색(辭色)은 태연하였다. 이를 본 몽고 관리는 비록 최춘명이 몽고에는 명을 거역하였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니 살려주라는 청을 하여 석방되었다. 뒤에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에 올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발탁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