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성은 고려 후기 대장군(大將軍), 어사대부(御史大夫), 수사공(守司空) 등을 역임한 관리이자 무신이다. 무신의 집정자인 최우(崔瑀, 개명 崔怡)의 최측근 인물이기도 하다. 1231년(고종 18)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안북부(安北府)에 출전하여 패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우와의 친분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최우에게 자기 딸을 주는 등 여러가지 청탁을 일삼으면서 권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특히 1232년(고종 19)에 강화도 천도를 결정할 때에 반대론자를 현장에서 처단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 방법으로 최우의 천도책을 적극 뒷받침하였다.
대집성(大集成)은 태집성(太集成)이라고도 한다. 고려로 귀화한 발해 왕족의 후손이다. 그의 사위는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집권자였던 최우(崔瑀, 개명 崔怡)와 고종(高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한 주숙(周肅)이다.
그는 고종 초기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그후 1218년(고종 5)에 무신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이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을 물리친 후 차장군(借將軍)에 임명되었고, 최우의 집권기에는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1228년(고종 15)에 대집성은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어떤 승려가 자혜원(慈惠院)을 짓는다 하여 강음현(江陰縣)의 나무를 벌채할 때 감무(監務)였던 박봉시(朴奉時)가 이를 금하자, 대집성이 최우에게 청탁하여 박봉시를 귀양 보내 버렸다. 1231년(고종 18) 8월에는 최우가 금 · 은 · 비단 등으로 장식한 화려한 어련(御輦)을 고종에게 바쳤는데 이는 대집성의 감독 아래 제작된 것이었다. 이 공으로 최우에게 말 · 의복 · 홍정(紅鞓) 등을 하사 받았다.
1231년(고종 18)에 몽골이 침략하자 그는 고려 3군(三軍)의 후군진주(後軍陣主)로 출전하였다. 대집성은 안북부성(安北府城) 안에 있으면서 적군에게 농성하는 것보다 성 밖에서 대회전(大會戰)을 하자고 주장하며,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안북부전투(安北府戰鬪)가 일어났으나 그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 또한 몽골군 선봉대가 개경을 포위하자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우는 몽골군 대장 살리타와 강화(講和)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대집성은 몽골의 요청으로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자주성(慈州城)을 항복 시켰는데, 그 자주성 전투에서 항복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자주부사(慈州副使)인 최춘명(崔椿命)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유승단(俞升旦)의 반대와 몽골 관인의 만류로 최춘명은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1232년(고종 19) 2월에 대집성은 과부였던 자신의 딸을 최우에게 들여 그의 장인이 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최우의 강화천도(江華遷都) 주장을 적극 옹호하여 천도를 성사시켰다. 이것은 대집성이 6월 16일 강화천도를 둘러싼 첨예한 회의에서 정무(鄭畝)와 함께 최우의 천도 결정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나선 결과이다. 유승단(兪升旦)이 천도를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서 정책 결정이 어려워지자, 개경고수론(開京固守論)을 펼쳤던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冲)을 현장에서 처단하도록 함으로써 반대론을 제압하였다. 천도 이후, 그는 최우의 외척으로서 강화 천도에 공이 있다 하여 수사공(守司空)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1236년(고종 23)에 강도(江都, 江華京)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