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말엽 한성판윤 한규설이 짓고 살던 1890년대의 집으로 청계천 북측 장교동에 있었던 것을 국민대학내로 이건하였다.
한규설은 청주가 본관이며 어영대장 총융사(摠戎使) 한규직(韓圭稷)의 동생으로 무과(武科)에 급제. 포도대장, 의정부찬정을 역임하고 광무 9년(1905)에 의정부참정이 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시 극구 반대하다 파직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남작(男爵)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가 집을 지은 1890년대는 개화사상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때이며 ‘개량식한옥’의 기운이 태동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사랑채에 보일러 난방을 하고, 보일러 여열을 이용한 온실을 시설하는 새로운 시대성이 집에 반영되었다. 이들은 이건하면서 제외되어 지금은 보기 어렵게 되었다.
바깥행랑채 중앙에 소슬대문, 바로 이웃하여 중문간과 안행랑채가 있고 들어서면서 사랑채가 있는데 대문채 좌향과 90도각으로 돌아앉아 서남향을 하고 있다. 전체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정면4칸 측면2칸 반에 뒤로 방1칸이 꺾이어 있다. 사랑방 · 대청 · 방과 대청에 툇마루가 있고 유리미닫이가 시설되었다. 개량식집의 통식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4칸이 부설되며 ㄱ자형집이 되었다. 3칸 넓이의 안방, 6칸 대청, 2칸의 건넌방이 주요시설이다. 안방 뒷편으로 부엌이 있고 이어 방이 있다. 지붕은 팔작과 맞배가 한쪽식 차지하였다. 사당은 안채와 곳간채 사이에 있고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별채는 반빗간의 기능에 방이 부설되었고 곳간채는 4칸 규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