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염 ()

만헌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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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인물
조선시대 안성군수, 광주목사, 고부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군회(君晦)
만헌(晩軒)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24년(중종 19)
사망 연도
1609년(광해군 1)
본관
창원(昌原)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안성군수|광주목사|영광군수
관련 사건
정여립의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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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안성군수, 광주목사, 고부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군회(君晦), 호는 만헌(晩軒). 아버지는 정종석(丁終碩)이며, 어머니는 영광주씨(靈光周氏)로 주만귀(周萬貴)의 딸이다. 7세에 여숙(閭塾)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다가 23세 때 정황(丁熿)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9년(명종 4)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해 정황의 배소인 거제도로 찾아가 학문을 강마하였다.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에 들어갔고, 1567년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으며, 형조좌랑을 거쳐 1569년(선조 2) 능성현령이 되었다.

그 뒤 춘추관기주관·예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80년 영광군수가 되었다. 그때 임씨(林氏)와 나씨(羅氏) 사이에 소송사건이 있었는데, 명석한 재판을 진행하여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582년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안성군수를 역임한 뒤 1584년 광주목사(光州牧使), 1588년 고부군수를 지냈다.

그 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난한 공로로 1590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선되었다. 만년에는 후진 교육에 힘썼고, 1603년 80세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陞資)되었다. 저서로는 『만헌집(晩軒集)』 4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만헌집(晩軒集)』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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