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이 급격하게 확대되면서 점증하고 있는 군 병력의 확충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이 훈련소가 표방하고 있는 목표는 1943년 8월 16일에 발표된 ‘재만 한인 청년의 특별 훈련에 관한 문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이 문건에서는 “일본 신민으로서의 소질을 향상시켜 의무병역에 복종시키며 일본어를 습득시켜 일본 군대생활에 필요한 자질양성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하여 그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특별훈련소의 훈련실태를 살펴보면 훈련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었다. 전기는 징병 적령자 가운데서 소학교 하급 학년을 다녔거나 학교에 가보지 못한 자를 각 시·현의 훈련소에 입소시켜 내무·훈육·교련 등 450시간 이상의 훈련을 시켰다.
후기는 만 20세의 한인 청년 가운데 신체 검사를 거쳐 일본군대에 입대시키기로 결정된 자들을 길림성 서란현에 있는 ‘국립중앙청년특별훈련소’에 입소시켜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이 훈련소에서는 1944년 5∼6월까지 모두 3기를 배출했는데, 매기 훈련시간은 40일 전후였고 매기마다 1,000명씩 도합 3,000여 명을 훈련시켰다.
정신훈련의 주요 내용은 ‘충군(忠君)’·‘성전(聖戰)’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암송하게 하였다.
그 주요내용은 대원마다 일본군인의 천직을 엄격히 이행하고 용감무쌍한 무사도 정신을 발양하며 천황과 황국(皇國)에 충성하고 영(英)·미(美)를 격멸하고 성전을 완수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하루 16시간씩 대열훈련, 돌격훈련, 야외작전훈련 등을 하였다. 이 밖에 훈련생들은 농사를 짓고 방공호를 파고 흙과 석탄을 나르는 등 고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들이 먹는 것은 수수밥이나 보리밥이 주류였다. 이들은 훈련이 끝나면 강제 징병되어 전선에 보내졌다.
조선청년특별훈련소는 일제가 자신들의 전쟁 수행을 위해 재만 한인 청년들을 훈련시킨 뒤 전쟁터로 보내기 위해 설치한 훈련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