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조용제(趙龍濟), 종현은 법명.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철운(鐵雲) · 벽로(碧路) · 예암산인(猊巖山人), 당호(堂號)는 여시산방(如是山房). 전라남도 고흥 출생. 조용락(趙鏞樂)의 3남 중 장남이다.
13세 때 불문에 귀의하였으며, 1932년 중앙불교연구원(中央佛敎硏究院)의 유식과(唯識科)를 졸업하고, 그 해 박성순(朴聖純)과 혼인하였다. 4남 4녀를 두었으며, 그 중 차남인 조정래(趙廷來)는 『태백산맥』을 쓴 소설가이다. 1930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60년 대한불교법화종 이사, 1971년 대한불교불입종(大韓佛敎拂入宗) 교정원장(敎政院長) 등 불교 관계 요직을 역임하였다. 교육계에도 종사하여 18년간 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장을 지냈다.
한용운(韓龍雲)과 더불어 불교청년회에 가담하면서, 한용운의 애국적 실천력에 감화되었으며, 불교 학생 사상기관지인 『회광(回光)』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29년 동요 「엄마 가락지」를 『조선일보』에 발표하기 시작하여, 1930년 시조 「그리운 정」을 『동아일보』에, 1931년 「성북춘회(城北春懷)」를 『동광(東光)』에, 「백운대 갈 때더니」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조 창작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의 초기 시에는 불교의 교리에 관한 것과 함께 세태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 것들이 많다. 「귀향소곡」에는 일제의 침탈로 황폐해진 고향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호풍이역(胡風異域)」에는 만주 벌판에서 유이민들이 겪는 생활고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시조의 보편적 소재인 탈역사적인 자연공간을 벗어난 현실과 역사에 바탕을 둔 체험과 정한을 표현하였다.
중기 시에서도 현실적 삶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며, 특히 전쟁 체험과 분단의 비극에 대한 울분이 강렬하게 표출된다. 전란의 비참한 결과를 보여주는 「천애의 고아」 · 「환향(還鄕)」,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조국의 하늘」 · 「나그네길」 등이 그러한 예이다.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에서는 전몰 용사들의 넋을 추도하면서 삶의 무상감을 토로하고 있다.
그의 인생관은 기본적으로 종교에 기반하며, 번뇌의 초월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후기로 올수록 불교의 정신세계와 자연에 대한 관조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자정의 지구』(1969) · 『의상대 해돋이』(1978) · 『나그네길』(1989) 등의 시집에 창작의 결실이 묶여 있다. 시조 창작 외에도 이태극(李泰極)과 함께 『시조문학(時調文學)』을 발간하여 신인 발굴에 힘썼으며, 『관음경』 · 『아미타경』 등의 불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시조 시인으로서 그는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역사와 현실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장시(長詩)와 연작시 등의 실험적인 형식으로 담아낸 것으로서 독자적인 문학성을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