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 무촌리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집터와 무덤 등이 발굴된 유적.
이칭
이칭
진양무촌리고분, 진주무촌유적, 진주무촌리고분군, 진양무촌리가야묘
유적
건립 시기
청동기시대
관련 국가
소가야, 통일신라
소재지
경상남도 진주시
내용 요약

진양무촌리유적은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집터와 무덤 등이 발굴된 유적이다. 1993년과 2001~2002년에 걸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구릉지에서 조사된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과 출토 유물은 삼국시대 소가야의 고분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구릉지 아래의 평지에서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도로 유구, 공방터, 화장실 등은 당시 진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집터와 무덤 등이 발굴된 유적.
발굴경위 및 결과

진양무촌리유적(晉陽武村里遺蹟)은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에 있는 유적으로, 남강의 지류인 반성천에 인접한 구릉지와 구릉지 아래의 평지에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주1가 조사되었다.

주변에는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가 조사된 진주창촌리유적, 4~6세기에 조성된 원당리고분군, 7세기 대 집터와 고상건물터(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에 바닥을 만든 건물), 우물 등이 조사된 진주가산리유적 등이 분포한다.

진양무촌리유적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5~1997년에 간행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 중권(中卷)에 진양무촌리고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1991년과 1992년에는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두 차례 긴급 수습 조사를 실시하였다.

1993년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삼국시대 가야의 주2 9기, 앞트기식 주3 3기, 굴식 돌방무덤 2기, 통일신라시대 화장묘 7기, 청동기시대 집터 3동을 조사하였다. 이때의 조사 결과는 진양무촌리가야묘로 소개되었다.

2001~2002년에는 유적이 형성된 구릉지를 관통하여 진주~이반성 간 국도가 건설되면서 대규모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구릉지(Ⅰ지구)에서는 삼국시대 가야의 나무덧널무덤 51기, 돌덧널무덤 46기, 삼국시대 집터 및 고상건물지 11동, 고려 · 조선시대 무덤 308기, 조선시대 구덩이 27기 등이 조사되었다.

구릉지 아래의 평지(Ⅱ지구)에서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건물지 58동, 도로 유구 10개소, 우물 11기가 조사되었다. 발굴을 담당한 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는 진주무촌유적으로 6권의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형태와 특징

청동기시대 집터는 장방형이며 주4와 덧띠무늬토기가 출토되어 비교적 이른 단계에 속한다. 1호 집자리는 장벽의 전체 길이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단벽 길이가 7.5m로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며, 내부에서 3개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어 주목되었다.

3호 돌덧널무덤은 길이 6.2m, 너비 1m로 세장하며, 바닥에는 얇은 널돌을 깔았다. 지배계층의 고분으로 상당히 많은 부장품이 매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 유실되었고, 청동화살촉과 화살통장식, 그릇받침 등만 출토되었다.

6세기 전반에 축조된 5호 굴식 돌방무덤은 길이 5.4m, 너비 2m로 세장하며 바닥에는 얇은 널돌을 깔았다. 동쪽 단벽 중앙에 널길을 만들었는데, 석축한 널길은 2.5m 정도 확인된다. 6세기 후반에 축조된 4호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길이 2.5m, 너비 1.5m로 규모가 작다. 비록 조사된 고분의 수는 적지만 가야 묘제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구릉지(Ⅰ지구)는 5개의 구릉으로 나뉘어져 있고, 조사된 유구의 성격에서도 차이가 있다. 1구릉에서는 주로 삼국시대 집터와 지상식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2구릉에서는 정상부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구릉 하부에서 삼국시대 나무덧널무덤과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3구릉에서는 구릉 하부에서 돌덧널무덤이 조사되었다. 4구릉에서는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5구릉에서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다수의 구덩이와 지상식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의 생활유적과 무덤유적이 위치를 달리하여 조성되었다. 출토 유물 중 4세기 대 토기는 가야의 공통적인 양식을 보여 주는 주5, 화로 모양 그릇받침, 짧은목항아리 등이며, 5세기 초부터 6세기 전반까지 소가야 양식 토기가 부장된다. 6세기 후반에는 앞트기식 돌방무덤과 함께 신라 토기가 나타난다.

조선시대 묘는 1~3구릉에서 확인되는데, 나무널이 있는 것과 없는 것, 화장묘로 구분된다. 부장품은 소량이며, 매장된 사람의 몸에 부착된 것과 벽면에 마련된 감실(龕室)에 부장한 것이 있다.

구릉지 아래의 평지(Ⅱ지구)에서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는 기둥을 지탱한 적심이 확인되는 적심석건물터와 고상건물터, 지상식 건물터 등으로 구분된다. 대부분 도로 주변에 지어져 있고,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다.

도로는 2개의 간선도로와 5개의 지선도로로 구분된다. 간선도로와 지선도로 사이에 건물터, 공방터, 점토 채취장, 구덩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110호 간선도로는 길이 100m 정도 조사되었고, 너비는 16~17m이다. 도로 양쪽 가장자리에는 너비 2m의 도랑을 만들었고, 노면에는 잔자갈이나 토기 조각, 기와 조각을 깔았다.

우물은 주거 공간에서 6기, 점토 채취장에서 5기가 확인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우물에서 출토된 소뼈인데, 이는 우물의 용도를 폐기하면서 소를 죽여 공헌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화장실은 2기 확인되었는데,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뒤처리용으로 추정되는 길이 8㎝ 정도의 나뭇가지가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공방터는 두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구리 공방과 기와 공방으로 추정되었다. 점토 채취 구덩이는 61기가 확인되었고, 점토 저장소 두 곳, 점토를 반죽하던 공간도 네 곳이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가마, 폐기장, 취사장, 말을 매납한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고려시대 건물터는 8동이 조사되었는데, 기단이나 초석이 확인된 것이 5동, 고상건물터 2동, 구덩이 집터 1동이다.

의의 및 평가

진양무촌리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어 진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구릉지(Ⅰ지구)에서 조사된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과 출토 유물은 삼국시대 소가야의 고분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구릉지 아래의 평지(Ⅱ지구)에서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도로 유구, 공방터, 화장실 등은 당시 거점 취락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준다.

참고문헌

단행본

『진주 무촌 Ⅴ,Ⅵ』(삼강문화재연구원, 2011)
『진주 창촌리유적』(경남고고학연구소(현 삼강문화재연구원), 2008)
『진주 가산리유적』(경남문화재연구원, 2005)
『진주 무촌 Ⅳ』(경남고고학연구소(현 삼강문화재연구원), 2005)
『진주 무촌Ⅰ~Ⅲ』(경남고고학연구소(현 삼강문화재연구원), 2004)
『진양 무촌리 가야묘』(국립진주박물관, 1994)
주석
주1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2

지면을 깊게 파고 자갈 따위의 석재(石材)로 덧널을 만든 무덤. 삼국 시대에 사용했으며 널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말샘

주3

돌로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려 봉토를 만든 무덤. 널길이 달려 있고 천장 구조가 다양하다.    우리말샘

주4

아가리 바로 밑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나 있는 토기. 청동기 시대에 가장 유행하였던 민무늬 토기이다.    우리말샘

주5

접시에 높은 굽을 붙인, 고대 식기의 하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해ㆍ경주 등지에서 많이 발굴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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