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무늬토기 (구멍무늬)

구멍무늬토기
구멍무늬토기
선사문화
유물
바리모양(鉢形) 토기의 아가리 아래쪽에 직경 5㎜ 이하의 구멍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새긴 토기.
이칭
이칭
공렬토기(孔列土器), 공렬문토기, 도들띠문장식토기, 유공토기(有孔土器)
내용 요약

구멍무늬토기는 바리 모양(鉢形) 토기의 아가리 아래쪽에 직경 5㎜ 이하의 구멍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새긴 토기이다. 구멍이 늘어져 있다고 해서 공렬(孔列)토기, 유공(有孔)토기라고도 한다. 민무늬토기시대에는 황해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골아가리무늬 등 다른 무늬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한반도 남부 전역에 나타난다. 한반도 동북 지방에서 기원하여 한반도 남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하남 미사리 유적을 근거로 자생하였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한반도 남부의 구멍무늬 토기는 일본 열도까지 확산되었다.

목차
정의
바리모양(鉢形) 토기의 아가리 아래쪽에 직경 5㎜ 이하의 구멍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새긴 토기.
내용

구멍무늬 토기는 기벽(器壁)의 관통 유무, 새김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무늬로 나뉜다. 토기 안쪽면에서 도구를 밖으로 찔러 바깥면이 혹처럼 솟은 미관통이나 반관통된 것을 돌류문(突瘤文)이라고 하고, 새김 방향에 관계없이 기벽이 관통된 것과 기벽 밖에서 안쪽으로 찔러 바깥면에 구멍 흔적이 새겨진 것을 공렬문(孔列文)으로 분류한다. 구멍을 새기는 도구는 봉상(棒狀)이나 죽관상(竹管狀) 도구로 추정되며, 구멍의 지름은 대체로 돌류문이 3㎜ 내외이고, 공렬문은 5㎜ 내외이다.

구멍무늬 토기는 주로 민무늬토기시대 전기에서 중기에 걸쳐 팽이형 토기의 주요 분포권인 황해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같은 수법으로 만든 토기는 이전의 신석기시대 후기∼말기에 한반도 남부 각지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즉, 신석기시대 구멍무늬 토기는 춘천 내평, 인천 용유도, 서산 대로리, 여수 월호도, 군산 노래섬 가지구, 부안 계화도 유적 등에서 1점씩 출토되었는데, 내평과 대로리 출토 토기는 돌류문이고, 나머지는 모두 미관통 공렬문이다.

따라서 무늬 종류에 따른 일정한 지역적 경향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들 구멍무늬 토기가 신석기시대 후기∼말기의 빗금문살무늬〔斜格子文〕와 결합하거나 겹아가리〔二重口緣〕토기와 짝하므로, 신석기시대 후기∼말기에도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계보가 명확한 것은 아니다.

청동기시대 구멍무늬 토기는 단독 무늬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다른 무늬와의 결합방식에 따라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구멍무늬는 골아가리무늬〔口脣刻目文〕와 결합하여 나타나는데, 이러한 토기는 출토지인 역삼동 유적의 이름을 따서 역삼동형(驛三洞型) 토기라고 부른다. 또한 구멍무늬와 골아가리무늬가 겹아가리무늬나 빗금무늬〔斜線文〕와 결합하거나 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출토된 여주 흔암리 유적의 이름을 따서 흔암리형(欣岩里型) 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동기시대의 구멍무늬 토기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한반도 남부 전역에 분포하였던 대표적 토기이다. 민무늬토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의 송국리 문화가 나타나는 지역 외에 한강 유역이나 영동 지방, 울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해안 지역에서는 무늬의 모습이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남아 있기도 한다. 이 토기들은 지역에 따라 구멍무늬 유형의 차이는 보이지 않고, 전 지역에서 돌류문과 공렬문이 혼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만, 중서부 지방에서는 공렬문이 다수를 차지하고 구멍의 직경도 작은 것이 우세한 반면, 동남해안 지역은 돌류문이 우세하고 죽관상 도구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직경이 비교적 넓은 편이다.

의의와 평가

청동기시대 구멍무늬 토기의 기원에 대하여 이전까지는 한반도 동북 지방의 무순 호곡 유적, 웅기 서포항 유적 4기 · 5기에서 돌류문과 공렬문이 소량 확인된 점을 들어, 이들 유적을 한반도 남부 구멍무늬 토기의 시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 지방에는 돌류문이 우세하고, 동북 지방에서는 공렬문이 소량 확인되므로, 이 견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한편, 압록강 상류의 강계 공귀리 유적에서 공렬문과 돌류문이 공존하는 일정량의 토기가 확인되었으므로, 이 유적의 토기 무늬가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또한 동북 지방의 구멍무늬 토기가 적지만 같은 시기에 아가리 아래 표면에 도구로 찔러 만든 자돌무늬가 여러 줄 새겨진 모습이 확인되었으므로, 이들 토기에서 구멍무늬 토기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구멍무늬 토기는 기벽에 무늬를 직각으로 하나하나 찔러 1조만 새긴 반면, 동북 지방의 자돌무늬는 기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찌른 흔적이 남아 있고, 눌러 삐치거나 그은 형태도 있으며, 여러 조를 새겼다는 점에서 새김 방식의 차이가 명확한 편이다.

더욱이 압록강 · 두만강유역에서 구멍무늬 토기가 형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출토 유물의 빈도가 적고, 이들 지역과 한반도 남부 지방 사이의 지역에서 구멍무늬 토기가 출토된 사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견해는 아직 검토의 여지가 적지 않다. 아울러 돌류문은 중국 동북 지방에서 확인된 둥근 덧띠 무늬〔圓形貼付文〕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구멍무늬 토기의 기원을 한반도 밖에서 구하는 견해와 달리, 한반도의 여러 유적에서 확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것은 신석기시대 후기∼말기에 이미 구멍무늬 토기가 등장하였고, 하남 미사리 유적의 구멍무늬 토기 출토 주거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조각과 뗀돌도끼〔打製石斧〕가 확인되었으며, 절대연대가 이른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한반도 남부에서 자생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빗살무늬 토기의 출토 정황을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고, 뗀돌도끼가 신석기시대 민무늬토기시대까지 출토되며, 형식학적 발전 양상이 분명치 않은 점 등으로 인해 구멍무늬 토기의 기원은 아직 정설이 없는 상황이다.

한반도 남부의 구멍무늬 토기는 청동기시대 전기말에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까지 확산되었다. 서일본의 산인〔山陰〕지방과 규슈〔九州〕지방의 죠몽시대〔繩文時代〕만기 중반의 쿠로카와〔黑川〕형 토기와 짝하여 나타나고, 야요이시대〔彌生時代〕전기 이타즈케1〔板付1〕식 까지 잔존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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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토기형식분류시고」(윤무병, 『진단학보』 39, 震檀學會, 1975)
『한국의 선·원사토기』(국립중앙박물관, 1993)
「경기도출토 무문토기 마제석기」(이백규,『고고학』3, 1974)
「西日本の孔列土器」(千羨幸,『日本考古學』25, 2008)
「前期無文土器の文樣編年と地域相」(安衣晧·千羨幸,『福岡大學考古學論集-小田富士雄先生退職記念-』, 2004)
「欣岩里類型土器の系譜をめぐって」(大貫靜夫,『東北アヅアの考古學』第二, 東北亞細亞考古學硏究會, 1996)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천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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